읽고본느낌

당신들의 기독교

샌. 2013. 6. 4. 09:39

이 책에는 10명의 개신교 신자(信者)가 등장한다. 통념적으로 믿음이 좋다고 부르는 사람들로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만나는 유형들이다. <당신들의 기독교>는 교인들을 대표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는 책이다.


그중에 교회 재정 담당 장로인 G가 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G는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의 알짬으로 삼는 부르주아로, 세계관이나 식견은 사뭇 보수적이다. 그의 부는 교회 내에서도 인정과 존경의 잣대이자 신의 축복에 대한 증거로 숭상된다. 그에게 벌이와 벌이의 체계를 성찰하는 의식은 전혀 없다. 그저 세속 속에서 열심히 돈을 축적하고,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 살아간다. 부유한 크리스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은이 김영민 선생은 G 같은 신자들이 존경받는 모습을 통해 이미 우리 시대의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약자들로 구성된 희망의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사적 욕망을 '소망'이라고 부르며, 자본제적 세속의 성취, 그 지위와 신분을 신앙으로 합리화하고, 교회마저 점유하고 영토화한 세속적 특권들의 심리적 봉토(俸土)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시 찾아올 예수를 가장 격렬하게 배척할 곳이 다름 아닌 교회다.


G와 대비되는 어느 후배 부부를 지은이는 소개한다. 그들은 명문대학을 거친 권한으로 얻은 천만 원에 가까운 맞벌이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다르게' 살고자 결의하였다. 그래서 결혼 3주년이 되던 날에 조촐한 기념식을 열고 몇몇 지기를 불러들여 맥주를 마시며 환담하던 끝자락에, 둘이 합쳐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을 벌지 않겠고, 그 나머지 시간은 증여와 화락(和樂)의 검소한 삶을 살겠노라고 선언했다. 같은 예수를 믿지만 G와 후배 부부의 신앙은 아주 다르다. 지은이가 주장하는 것은 '믿기'보다 '살기'를 통해 신앙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종교는 원래의 뜻에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월간 <기독교사상>에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지은이가 철학자여서인지 너무 전문용어를 남발하고 표현이 거칠어 읽기가 불편한 점이 아쉽다. 좀더 읽기 쉽게 썼으면 좋겠다. 그러나 글의 내용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책의 머리말에 지은이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다.


알지 못하므로 부득불 믿게 될 것이나, '믿는' 순간 부패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나 신불(神佛) 등이 다만 '되지' 않고 '믿기' 위해 주어진 최종심급의 심리제도적 장치였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장례식인 것입니다. 종교인(homo religiosus)으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호패는 고백이나 신념 혹은 어떤 감동의 울결 따위가 아닙니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이며, 가면의 일관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올곧은 삶의 양식 속에서만 삶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삶과 죽음의 총체성과 이를 생활정치화하는 일관성만이 그 영혼을 증거합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구성적으로 얽혀든 그 속도와 물매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 현실과의 날카로운 불화를 살피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은 마치 예수를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장송곡처럼 들립니다. 예수의 삶의 정황, 문제의식, 고민과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동, 그리고 삶이 그러했으므로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성격 등을 헤아리면, 종교에서 삶으로, 내세에서 현실로, 종말론적 환영에서 '지금 이것(今是)'으로, 고백에서 담대행방(膽大行方)의 행위로 나아가는 게 마땅합니다. 예수를 두 번 죽이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 그를 '믿는' 신자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가 있었으니 반드시 '(당신들의) 기독교'가 필요치 않으나,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남을 따르려는 삶의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자란 '타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입니다.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 떼처럼 번성합니다. 이제 '신자'의 파리 떼와 그 파리대왕들의 틈 속에서 유일한 가능성은 '제자'이지만, 아,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그 스승을 '믿지' 않은 채 그보다 앞서 '걸어가는' 공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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