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귀태(鬼胎)

샌. 2013. 7. 15. 10:14

민주당 홍익표 대변인의 '귀태' 발언으로 정국이 달아오르더니 이제 진정되어 간다. 여당이 국회 일정을 거부하자 문제의 발언을 한 야당 대변인이 사퇴하고 대표가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홍 대변인의 발언은 이랬다.

 

"작년에 나온 책 중에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에 귀태(鬼胎)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鬼)자에다 태아 태(胎)자를 써서,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에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다. 아베 총리는 시기 노부스케의 외손자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의 장녀이다."

 

귀태라는 말의 어감 때문인지 청와대와 여당이 발끈하면서,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모욕, 자유민주주의에 정면 도전한 것 등의 논평을 내며 민주당에 맹공을 퍼부었다. 박정희를 귀태로, 박근혜 대통령은 귀태의 후손으로 표현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동시에 국정원 선거 개입 국정조사를 앞두고 야당의 기를 꺾기 위한 전술적 작전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대변인이 인용한 책의 내용이 궁금해 찾아서 읽어 보았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다. 강상중과 현무암 공저로 되어 있다.

 

정독하지는 못하고 대충 훑어 보았는데 한국과 일본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내용이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만주국은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와 독재자 박정희를 만들었다. 시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으로 근무했고,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전초기지면서 병영국가의 실험실로 활용된 만주국의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두 사람의 정치 철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로 독재자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만주국에서 시행한 통제경제의 실험은 그대로 한국의 개발독재로 이어졌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그 본질에서 일본 극우가 꿈꾸었던 쇼와유신의 한국형 변종이었다. 계획경제, 새마을운동, 국기하강식, 애국조회, 군사교육, 충효교육, 국민교육헌장, 반상회, 총력안보체제 등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시행했던 국가주의 요소를 그대로 본따 부활시킨 것이었다. 박정희는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와 행동법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런 사고와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다스렸다. 일본의 요괴와 한국 독재자의 뿌리는 만주국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인 현 아베 총리,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으로 어두운 유산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를 귀태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책에서 귀태는 '제국의 귀태들' '만주가 낳은 귀태들' '되살아나는 귀태들' '귀태들의 한일유착' 같은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귀태에 대해서는 짧게 이런 주가 달려 있다. 귀태(鬼胎) - "작가 시바 료타로의 조어다. 의학적으로는 융모막 조직이 포도송이 모양으로 이상증식(異常增殖)하는 '포도상 귀태'를 뜻하지만, '태어나서는 안 될, 사위스러운, 불길한' 같은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말이다."

 

귀태라는 일본식 단어가 여권에서 발끈할 정도로 그렇게 인격모독적인지 의문이다. 더구나 국민과 대한민국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아마 귀신 귀(鬼)자가 들어가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게 아닌가 싶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어두운 유산을 청산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우려할 만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 극우파의 행태를 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과거 반성이 전혀 없이 도리어 큰소리를 친다. 집권층은 귀태라는 말에 너무 과민반응하지 말고 이 말을 통한 시대의 경고에 귀를 열어야 할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통해서 만주국과 박정희, 그리고 친일파의 행적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교 국사 시간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국에 있던 친일파들은 남한으로 내려오고 이승만은 이들을 도리어 환영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핵심 권력으로 성장했다. 그중에 만주국 헌병 대위를 지낸 정일권,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을 전멸시킬 목적으로 창설된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 백선엽도 있다. 최규하는 만주국 고급공무원 양성소인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관리로 근무했다.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이었고,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김대식 등도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이라고 책에는 적혀 있다. 이런 세력들이 이승만, 박정희에 충성하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호국영웅으로 둔갑되기도 한다. 이번 귀태 소동을 보면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남한의 업보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본다. 친일파에게 박정희 시대는 낙원이었을지 몰라도 그런 시대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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