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불주 한 달째

샌. 2013. 7. 9. 11:25

한 달째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모임에 참석해도 건배주 한 잔은 받지만 입술에 축이는 정도다. 전 같으면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집에서도 자주 홀짝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굳건히 참고 있다.

 

술이 생각나다가도 한 달 전 버스 승객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던 눈초리를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젖게 된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장면은 또렷이 남아 있다. 너무 부끄러워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선배가 수돗가에 데려가 씻어주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이젠 술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체력이 안 받쳐준다. 한순간에 뿅 가버리고 그 뒤부터는 집에도 찾아가지 못한다. 몽유병 환자가 된다. 그러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잔다. 어느 때는 주차된 차 밑에 들어가 자다가 차 주인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지 싶어서 술을 끊겠다고 결심했다.

 

술을 끊었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반응한다.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겠느냐는 사람도 있다. 나를 얌전하게 술 마시는 사람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대체로 절주를 잘하지만 가끔 오버를 하는 게 문제다. 브레이크가 작동 안 될 때가 있다. 젊다면 귀엽게라도 봐주지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길거리서 추태를 부리는 꼴은 나조차 용서하기 어렵다.

 

전에 위가 아파서 한 달 정도 금주(禁酒)한 적은 있었지만, 아예 술을 끊기로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술을 안 마시니 우선 속이 깨끗해서 좋다. 고기를 훨씬 적게 먹는다. 술이 있으면 자연히 고기 안주를 찾게 된다. 또, 술을 마실 때는 즐겁지만 그 뒤 이삼일 동안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항상 후회하지만 그래도 단주(斷酒)는 생각도 안 했었다. 뭔가 쇼크가 있어야 변화가 일어난다.

 

40대 중반에 담배를 끊었고, 인생 3막을 시작하며 술을 끊는다. 뒷날 분명히 잘한 결심이었다고 나를 칭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 달이 지났어도 알콜이 별로 그립지 않은 걸 보니 앞으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술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 술꾼들과의 자리는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말똥한 정신으로 술자리에 몇 번 앉아 있어 봤는데 술 취한 사람 얘기를 듣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시시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저런 게 옛날의 내 모습이기도 했을 것이다. 술은 못 마시면서도 술자리에는 끝까지 남아서 분위기를 맞춰주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도저히 못 그럴 것 같다.

 

조지훈 선생은 어느 글에서 주도(酒道)를 설명하면서 술꾼 등급을 18단계로 나누었다. 그중에 맨 하급이 불주(不酒)다. 불주란 술을 마실 줄 알지만 일부러 안 마시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부터 불주당원이 되겠다. 바둑은 급수를 높이려 애를 쓰지만, 술은 맨 하급으로 자처하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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