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설국열차

샌. 2013. 8. 24. 10:08

 

빙하기로 멸망한 지구 위에서 인류의 마지막 생존터인 설국열차가 17년째 달리고 있다. 질주가 멈추면 파멸에 이르는 비유가 현대 사회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현재 스스로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지젝의 지적대로 종말을 향한 폭주로 설국열차의 이미지가 딱 맞는다. 계급에 따라 칸으로 나누어져 있고 질서와 균형을 강조하는 열차 안은 인간 세상의 작동 시스템과 유사하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체제 전복을 꿈꾼다. 결국 커티스를 중심으로 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앞칸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간다.

 

메시지가 강한 영화다. 나로서는 서구문명의 몰락과 새로운 인류 사회의 탄생이라는 희망으로 읽힌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양 소녀와 흑인 소년으로부터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건 15세기부터 역사를 주도한 서구 사상에 대한 분명한 비판이다. 인류가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 끝에 파멸, 그 뒤에 완전히 제로 그라운드에서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차의 엔진과 그 엔진을 만든 윌포드는 신격화된다. 열차 바깥세상은 죽음이라고 끊임없이 교육받는다. 체제에 순응하는 양들을 기르는 건 지배자의 목표다. 그러나 어디서나 우상 파괴자가 있다. 커티스는 혁명의 리더지만 한계가 있다. 열차 시스템 자체를 건드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남궁민수는 열차 바깥을 본다. 눈과 얼음의 세상이지만 눈이 녹고 있음을 알아챈다. 혁명가를 넘어서는 혁명가다. 그는 크로놀 중독인 체하며 탈출을 꿈꾼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제 일에는 열중하지만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더구나 세상에 대한 사유 능력은 아예 상실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위치가 있다는 세뇌교육 때문이다. 메이슨 총리는 꼬리칸 사람들에게 신발은 신발의 자리를 지키라고 연설한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사는 게 편안하긴 하지만, 소나무 너머 숲을 꿈꾸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열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이다.

 

꼬리칸의 아이를 골라서 엔진의 부속으로 사용하는 장면은 기계의 일부로 된 인간을 비극적으로 상징한다. 대규모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도 이에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이처럼 영혼마저 앗긴다면 인간은 기계 부품으로 전락할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인간의 장기도 기계로 대체될지 모른다. 그게 어떤 세상일지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열차 안에서는 폭동이나 혁명이 적절히 부추겨지고 조절된다. 공동체 유지를 위해서 적당한 불안이나 긴장 조성도 필요하다. 꼬리칸에서 성자로 추앙받던 길리엄은 윌포드와 내통하고 있었다.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 어쩌면 체제 유지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 중심부의 치밀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일 것이다. 윌포드를 만난 커티스는 혼돈에 빠져 판단 능력을 상실한다.

 

설국열차라는 상상력이 대단하다. 설원을 달리는 열차 이야기를 통해 감독이 전하고 싶은 게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인과관계라든가 구성이 치밀하지 못한 건 유감이다. 어쩔 수 없었겠지만 폭력 장면도 너무 많다. 서정성이 좀더 가미되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광주 롯데시네마에서 사촌 형님네 가족과 같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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