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엄마가 아이를 망친다

샌. 2013. 8. 30. 09:21

교직에 있으면서 엄마의 지나친 교육열이 아이를 망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결손가정이나 방임 때문에 생기는 문제보다 이쪽이 훨씬 더 심각했다. 자식을 잘 키우려다 오히려 반편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독립심을 길러주고 놓아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끝까지 보살피려 한다. 내 자식은 특별하게 키우려는 엄마의 욕심 때문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건 대견하지만, 엄마에게서 떠나려는 건 받아들이지 못한다. 딸보다도 아들한테서 이 문제는 심각하다. 엄마한테서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경우도 여럿 보았다. 겉모습은 그럴듯하더라도 온실 속에서 길러진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심지어는 결혼한 뒤에도 모든 걸 부모에게 의지하려 한다. 안쓰럽다고 그걸 다 받아주는 얼빠진 부모들이 많다. 반찬 해 나르기, 청소해 주기, 손주 봐주기는 기본이다. 바퀴벌레를 잡아달라고 전화하는 철없는 아들 때문에 황당해 하는 어느 엄마도 보았다. 아,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구나, 뒤늦은 후회를 해본들 소용없다. 누굴 탓하겠는가, 자기가 그렇게 키워 놓은 인과응보인 것을.


물론 자식 문제는 부모 공동의 책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식 교육은 거의 엄마의 권한에 속한다. 아빠의 의견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가한 생각으로 도외시된다. 엄마가 방송이나 이웃으로부터 주워들은 정보가 아이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웃집 아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여러 학원에 다녀야 한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의사나 법관이 된 자식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자면 일류 대학에 가야 하는 건 필수 코스다. 오직 그 목표를 향해 모든 노력이 경주된다. 그래서 아이의 마음이 병드는 건 모른다. 지나친 경쟁이 어떻게 인성을 파괴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렇게 말하면 욕먹을지 모르겠으나, 남과 비교되는 데 너무 예민하면서 핏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게 한국 여성의 단점이다. 사회적 병리 현상의 많은 부분이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개발시대 때 생겨난 치맛바람이 이젠 광풍으로 변했다. 어떤 엄마를 보면 도대체 자신의 존재 의미가 오직 자식에게만 있는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자식을 지켜줘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라도 띄고 이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이런 경향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엄마일수록 더하다. 여성의 현실 인식이 정확하긴 하지만 깊이나 내적 성찰은 떨어진다. 진실로 자식의 행복을 생각한다면 시류에 휩쓸린 이런 식의 양육에는 회의를 느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다 그런데, 라고 변명하는 건 비겁한 회피다. 아이를 잘 키우려다 아이를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아이는 커서도 절대로 부모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자랄 때 행복하지 못한 아이가 커서 행복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부모를 적대시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사춘기가 지나면 부모 역할은 곁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챙겨주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라. 도움을 청할 때면 부모는 조언자 노릇만 하면 된다. 중요한 건 아이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 몫의 행복이 있고, 중학생은 중학생 몫의 행복이 있다. 아이의 행복을 앗을 권리는 부모에게 없다. 일류대학이나 신이 내린 직장, 의사나 판사가 되는 건 우리 삶을 이루는 다양한 측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걸 전부라고 부모가 착각하는 데서 비극이 시작된다.


타율을 몸에 배게 하는 데는 학교도 한몫을 한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인문계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자율학습'이라는 말도 얼토당토않다. 이런 언어와 내용의 불일치를 아이들이 모를 리 없다. 학교라는 시스템이 인간의 자발성을 거세 내지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학교는 민중의 계몽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한 첨병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마저 인간과 진리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기업을 위한 인재양성소 역할을 한다. 사회 전체가 오직 욕망과 소비를 부추길 뿐이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식 역시 세상이 가르치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그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제 한 몸만 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제 자식 챙기는 데만 올인한다.


부모가 되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결혼식만 올린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철부지 부부들이 참 많다. 이는 물론 지금 시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들볶이면서 양보할 줄도 알고 배려도 배우면서 자랐다. 그러나 요사이는 자식이라야 고작 한둘에 불과하고 다들 왕자나 공주 대접을 받으면서 큰다. 잘못하면 저 하나만 아는 반편이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 여기에 부모의 과잉보호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대책이 없어진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젠 자식에게 맨 고삐를 풀어주자. 강남에 소아정신과가 번성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천민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우리나라는 너무 껍데기에 치우친 세상이 되었다. 이젠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의 의식이 변해야 한다. 자식을 닥달하기 이전에, 나는 지금 행복한가, 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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