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친구, 동지, 동무

샌. 2013. 9. 7. 08:18

친구

 

전일하게 다양해진 자본주의와 매고르게 신체화한 상업주의 속에서 부패하고 속물화한 인정투쟁의 일상을 살아 내고 있는 친구들은 그 가차 없고 삭막한 부가가치의 계단을 좇아 스스로를 파편화, 분열화, 원자화시키면서 신분상승의 꿈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친구들은, 오늘도 정실과 연고, 인맥과 학맥, 그리고 지역과 출신의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친구로서의 연대와 실천을 공고히 함을 통해 그 오래된 의리를 충량(忠良)하게 지켜 낸다. 스스로의 존재를 자본의 스케일 위에 환원/환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은 물화(物化)의 과정 속에 투신하여 '기계-남자'나 '도구-여자'로 변신, 또 변신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속에 모여드는 친구에게는 동지들이 추구하는 대의나 이데올로기마저 없으며, 관념적 이론이 이토록 부재한 자리에는 오직 정서적 일체감이라는 사적 우연성만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의 명암과 굴곡을 거치며 얻은 탁하고 묵은 관계인 친구는 시간이 보존해 온 향수이며, 그 향수를 공유하는 몸의 기억이 만든 관계다. 무엇보다, 친구는, 듣지 않는 관계이기도 한데, 그들은 끊임없이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면서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하고 추억을 채색하지만, 응당 괄목상대해야 할 그 친구들의 외부성과 타자성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온갖 연줄로 얽혀 든 사회 속에서 영원한 친구로 남게 된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 보지 못하여 한 번도 제대로 '나'가 되어 보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 부르는 것이다. 척마(尺魔)의 위용이 아니라 촌선(寸善)의 졸루(拙陋) 속에 그 본질이 놓인 세속이기에, 문제는 적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라 할 수 있으며, 인문학적 삶과 실천의 기본양식, 그 세세한 버릇의 양태를 '친구'라는 명사로부터 '동무'라는 부사로 바꾸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모든 진보는 헛손질이며 헛힘이며 헛구역질로 남을 따름이다.

 

 

동지

 

신념이나 대의를 특정 공동체가 지닌 모종의 '희망'으로서 거칠게 번역할 수 있다면, 희망으로서의 신념/대의는 단편적인 학습이나 간헐적인 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응당 글-말(응대)-생활(버릇)이라는 누적된 구조 속에서 시숙의 과정을 거치며 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무늬의 총화(蔥花)와 다를 바 없어야 한다. 대의나 신념이 뿌리내리고 있는 거대담론으로서의 희망마저도 결국 사람무늬[人紋]의 문제라면, 혁명에 참가한 이들이 그네들의 글과 말, 더 나아가 생활양식(버릇/습관/태도)이 지닌 맹목적 생산성을 통해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고 있는지의 여부만이 혁명의 진정성을 이드거니 증명해 낼 것이다. 허나, 글과 말 그리고 생활이 섞이고 겹쳐서 이루어 낸 '무늬로서의 신념'이 아니라 '구호로서의 신념'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들이 동지가 될 수 있다면, 그 동지들은 '내 곁에서 혁명을 외치고 있는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품기도, 그 질문에 답하기도 힘들다. 무늬로서의 사람 혹은 사람으로서의 무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방기된 상황에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이들이라면, 서로의 무늬에 대한 동정적 혜안에서 우러나는 존재론적 비평을 주고받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며 행진한 결과 얻어 낸 혁명이라 할지라도, '무늬 없는' 혁명 이후에 동지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뜨겁던 혁명이 차갑게 식어 버린 일상에서 황량이 드러나는 '무늬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동무

 

신(神)과 갖은 형이상학이 사라진 진공의 공간에 틈입한 외로움은 (근)현대사회의 대기를 온통 장악하였고, 실재의 바닥과 그 허무가 드러내는 심연이 차마 끔찍할 지경인 외로움에 둘러싸인 (근)현대인들 사이에는 허무주의적 냉소와 나르시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져갔다. 이제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골몰하게 된 '똑똑한' 인간들의 자의식은 피폐의 공전 속에서 발광(發光)하다 결국 발광(發狂)의 징후를 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 골몰과 피폐의 연쇄 구도를 뚫어내지 못하면 실천의 연대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일인칭 관념의 감가상각'만이 끝없이 계속되며, '늘 동일한 것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 선택'의 조합에 다름 아닌 '생각' 속에서 내부 침식만을 겪게 된다. 이 때문에, 무릇 근대 이후의 똑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명랑하게 연대하며 체계의 외부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다종다양한 이론들에 포위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끄-을-고 이론을 뚫어 내어 일상의 낮은 자리로 내려앉힐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사변의 피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조형해 나가기 위해 서로간의 차이[同無!]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길 없는 길'을 걸으며 체계와 자아 너머로의 산책을 나선 이들이 바로 동무이며, 슬기-근기-온기가 수렴되는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을 모색해 나가기 위해 함께 어긋내며 어울리며 어리눅어 가는 이들이 동무이다.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에 머물며 '듣지 않고도 아는(말이 필요 없는)' 관계로서 얽혀 있는 친구가 아닌, 동무란, 섬세하고도 서늘한 '버텨듣기'로써 비판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이들이며, 동지들의 중심주의적 결집 대신 오직 동무 사이의 약속과 신뢰를 그 기반으로 삼아 호감과 신뢰 사이에 가로놓인 비약의 심연을 그대로 인식하고 공대하는 관계이다. 달리 말해, 동무되기란, (체계로부터의 초월이 아닌)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는 좋은 몸들이 빚어내는 전염의 자장, 그 열린 지평 앞으로 나를 호출하여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들어 보는 재조합, 재구성의 실험장이자, 해체와 갱생의 경험인 것이다. 동무로서의 나는 끝없이 '넘어가는 존재', '전염시키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표준화한 위성(衛星)들과 그들이 백귀야행(百鬼夜行)하는 인정투쟁/냉소/가족주의를 '섭동시키는 존재'로 부름 받게 된다. 동무를 사귀는 일 혹은 동무가 되는 일은 미래적인 존재양식에 나를 견주며 겹쳐 보는 일을 의미하기에, 동무는 연인은 물론이거니와 동지나 친구에 비해서 매우 어렵고 '위험한' 관계인데, 오직 스스로의 동무됨을 통해서만 그 메시아적 기미를 체감해 볼 수 있다. 

 

 

김영민 선생의 글로, 친구, 동지, 동무의 개념을 명쾌히 정리했다. 북한에서 사용한 탓으로 금기어가 돼서 그렇지 동무는 참 좋은 말이다. 사전에서는 동무가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 '어떤 일을 하는데 서로 짝이 되거나 함께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은 인위적으로 친구와 동무의 의미를 구별한 것 같다. 동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즉, 동무란 길벗이며 도반(道伴)이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君子)도 동무에 가깝다. 인생의 참됨은 단 한 명의 동무라도 가졌느냐와 함께, 나의 '동무되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백 명의 친구보다는 열 명의 동지가 의미 있고, 열 명의 동지보다는 한 명의 동무가 낫다.

 

동지에서는 최근의 통진당과 이석기 사태가 떠올랐다. 그들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동지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구호로서의 신념'에만 너무 매몰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신념과 대의를 지켜나가는 고집이 존경스럽기는 하지만, 아름답던 이상도 딱딱한 교조가 되어 버리면 추해진다. 왠지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차갑고 황량하게 느껴진다.

 

선생은 동무의 특징을 이렇게 그렸다.

 

생각 대신 공부하는 이.

호올로 좋아하기보다는 서로 돕는 이.

구경하는 대신 몸을 끄-을-고 개입하는 이.

영리하게 매매하기보다 현명하게 주고받는 이.

타자성이라는 심연을 동정적 혜안으로 굽어볼 줄 아는 이.

초월하지 않기 위해, 진리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이.

글-말-생활-희망을 축으로 함께 사귀고 배우며 비평하는 이.

아무리 거듭 만나도 온기가 끈끈함으로 변질될 줄 모르는 이.

고백과 소문을 피하는 대신, 극진히 듣고 찰지게 대화하는 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현명함이 속으로 고여 흐르는 슬금한 이.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고자 걸으며 체계 외부적 생산성을 얻는 이.

체계가 기입시킨 상처의 우울로 체계 너머의 명랑을 빚어내는 성숙한 이.

마음/기분/심리를 알면서 모른 체하기 위해 근기 있게 약속하며 지키는 이.

독창성이라는 허영의 '얼룩' 대신, 겸허한 모방이라는 인정의 '무늬'를 지닌 이.

노릇이 아닌, 생활의 무늬/삶의 태도/버릇만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모방하는 이.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단순하고 내 몸은 튼튼하니까  (0) 2013.10.15
무사시의 작약  (0) 2013.09.24
엄마가 아이를 망친다  (0) 2013.08.30
어떤 꿈을 꿈  (0) 2013.08.21
마십시오  (0) 2013.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