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우리 시대 산상수훈 / 고정희

샌. 2013. 9. 9. 08:00

내 뒤를 따르고 싶거든

남의 발을 씻겨주라

씻겨주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기 자랑 시대,

남의 발 씻기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몸종이라 부르네

 

내 십자가를 지고 싶거든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

그대를 세상은 빨갱이라 부르네

 

내 기적을 알고 싶거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고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까지 따라가라

따라가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먹이사슬의 시대,

몸을 달라 하면 쓸개까지 주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창녀라 부르네

 

내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땅에서 가난하라,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 주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본독점 시대,

오직 가난한 이 여기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거지라 부르네

 

아아 주님 당신은 위대한 허풍쟁이

대책 없는 허풍쟁이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하면 주실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말씀하셨건만

구하고 두드리는 이 반동이라고 부르네

아니오 하는 이 반체제라 부르네

 

- 우리 시대 산상수훈 / 고정희

 

 

만약 모든 기독교인이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데 행동 통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라는 말씀은 어떤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에 보험을 들고 예금을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반인 금융업이 붕괴되면 아마 세상은 천지개벽이 될 것이다. 세상의 종말일 듯 싶지만 사람들은 은행 없이도 수천 년을 잘 살아왔다. 은행에 의존하게 된 건 불과 백 년 남짓이다.

 

신자들은 너무 착하다. 기존 종교 체제가 가르쳐주는 착한 신자 프레임에 갇혀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 말씀의 혁명성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드물다.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교회나 성당에 예수의 정신이 살아 있을까? 차라리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구석진 곳이나 어두운 곳을 찾아가야 할지 모른다.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는 그곳의 그이가 우리 시대의 예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