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 / 한영옥

샌. 2013. 9. 17. 08:10

무더운 어느 하루라도

큰 회화나무에서 떨어진 꽃무늬는 참 좋다

줍고 싶을 만큼 태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

쓸어버려야 할 만큼 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 그늘 안쪽으로 살풋하게 내려앉은,

흰빛에서 연둣빛 사이를 오가며 엮은

수수한 돗자리처럼 보이는 심심한 무늬가

두어 평 남짓 안에서 고요하다

수수한 자리에 슬며시 들어서서

몹시 우는 매미를 열심히 받아주노라면

이해 불가능에서 이해 가능으로 길이 꺾이고,

꺾이자마자 길은 곳곳이 맘 좋은 초록이다

몇 송이 꽃잎을 더 내려 앉혀주며 여름은

편하게 제 깊이를 다 펴고 한숨 잔다

고요한 그 사람의 속 깊은 염려 속인가,

생각수레 덜컹거리지 않아 악의(惡意)도 잘 잔다

꺾인 길섶으로 한참은 더 초록이 좋으리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는 좋기도 하지.

 

-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 / 한영옥

 

 

사당동에 살 때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는 회화나무 가로수가 있었다. 여름날이면 자디잔 연록의 꽃잎이 눈이 내린 듯 보도를 덮었고, 큼큼한 꽃향기가 코를 간지렸다. 얼마나 곱게 떨어졌는지 꼭 나무 그림자 같았다. 도시의 번잡함 가운데서 잠시 머물 여유도 없었지만, 시골집 마당에 이런 회화나무 한 그루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해 봤다. 아마 그렇다면 꽃잎은 쓸어내지 않고 두고두고 볼 것이었다. '생각수레 덜컹거리지 않아 악의도 잘 자는....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는 좋기도 하지' - 이런 정물화가 참 좋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