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소리에 둔해지기

샌. 2013. 9. 26. 10:48

우리 나이가 되면 몸의 기능이 저하되는 걸 실감한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나 예외가 있다. 청력만은 젊었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어디서 들은 얘긴데, 늙어서도 계속 자라는 것이 귀라고 한다. 그래서 귀가 큰 사람이 장수한다는 말도 생겼는가 보다. 귀는 외형뿐만 아니라 성능에서도 제일 오래 버티는 기관인지 모른다.

 

100세 넘게 사셨던 외할머니도 마지막 몇 년을 빼고는 청력만은 정상이셨다. 옆에서 소곤소곤하는 얘기도 들으시고는 참견을 하셨다. 그게 싫었던 어머니는 어떻게 젊은 사람보다 귀가 더 밝느냐고 혀를 찼다. 귀 때문에 외할머니는 지청구를 많이 들으셨다. 늙어서는 못 들은 척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귀가 밝다는 건 축복이기보다는 성가신 일이다.

 

상하좌우로 다닥다닥 붙어서 사는 아파트에서 제일 큰 문제가 층간 소음이다. 세상에는 남을 의식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웃을 잘못 만나면 생고생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눈꺼풀처럼 귀에도 여닫는 셔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보기 싫은 게 있으면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면 되지만, 소리는 그렇지 못하다. 귀 안에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는 소리의 차단막이 있다면 소음 스트레스는 훨씬 줄어들 텐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잠을 자더라도 소리는 들을 수 있도록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위험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원시인들이 적이나 위험한 동물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생존 확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이는 모든 동물의 공통된 보호 장치인 셈이다. 그러니 귀에다 셔터를 장착해주지 않았다고 신을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 들어 눈은 자꾸 침침해지는데 귀는 더 밝아진다. 차라리 귀는 좀 어두워져도 괜찮은데 오히려 반대다. 세상에는 꼭 들어야 할 소리보다 안 들어도 될 소리가 훨씬 더 많다. 사회생활할 때도 그랬지만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싶은 때가 지금도 여전히 많다. 어떤 소리에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별무상관이겠으나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원치 않는 소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소음원에서 도망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너그러워져 포용하는 것이다. 도망하는 방법은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밤골 생활을 했을 때 도시의 소음은 사라졌지만 밤새 옆집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망갔다가 도리어 강적을 만났다. 결국 소음원 제거가 어렵다면 내 마음을 다스리는 길밖에는 없다. 마음이 닫히고 날카로워져 있을 때 외부 소리에 더 예민하다.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이 되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조용한 걸 찾을수록 자꾸 민감해지는 이 소리의 역설, 소리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둔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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