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갈매못 성지

샌. 2013. 11. 2. 20:18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는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갈매못은 그 갈마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866년 3월에 이곳 바닷가에서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오메트로 오 베드로 신부, 우앵 민 루가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5명이 순교했다. 당시는 고종 국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때라 한양에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다는 무당의 말에 따라 이곳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어 군문효수하게 된 것이다. 여기는 1846년에 프랑스 함대가 3척의 군함을 끌고 왔던 외연도가 가까운 곳이다.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이곳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교회사를 편찬하는 등 전교 사업을 하다가 1866년에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분이다. 다섯 분은 한양에서 이곳까지 일주일에 걸쳐 압송되었고, 3월 30일 주의 수난일에 순교했다. 다섯 분은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갈매못 성지는 다섯 분이 순교한 터 위에 세워져 있다. 당시 200여 명의 군인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주민들과 신자들이 순교의 현장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승리의성모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예수 수난 조각상.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다블뤼 주교의 좌우명이었다는 이 글귀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비록 날라리 신자이긴 하지만 성지에 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된다.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정도의 굳은 신앙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붙잡혀서 받는 고문이나 모욕에 비하면 차라리 목숨을 내놓는 게 더 쉬웠을지 모른다. 악랄한 환경이 차라리 더 굳센 믿음을 키우는 건 아닐까. 믿는다는 게 곧 죽음을 뜻하는 그때와, 이제는 종교가 마치 취미 생활처럼 변해버린 현대를 비교해 본다. 

 

갈매못은 직접 서해와 접해 있다. 인근에 오천항이 있다. 오천은 백제 시대 때부터 항구로 이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수영(水營)이 설치된 곳이다. 충무의 경상수영, 여수의 전라수영과 함께 오천의 충청수영이다. 한때 수군 3,000명이 주둔했던 이곳에는 오천성 일부가 남아 있다. 달래 신부가 갈매못 성지를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형장은 바로 수군의 훈련장이었다. 현재의 오천은 바다낚시를 하기 위해 몰려온 자가용으로 분주한 곳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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