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매뉴얼의 시대

샌. 2014. 6. 3. 09:44

새로 생긴 직업 목록을 보다가 '연애관리사'가 있는 걸 보고 실소했다. 이젠 연애마저도 코치 받고 관리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성의 심리, 대화 기법, 여러 상황에 따른 대처법, 관계를 이어나가는 흐름 등을 가르친다고 한다. 남자들 사이에 인기라는 '픽업 아티스트(pick up artist)'는 속되게 말하면 여자 꼬시는 테크닉을 전수해 준다. 돈을 주고 연애의 기술을 배우는 시대다. 연애가 좀 서툴면 어떤가, 사랑하는 과정에도 공식과 매뉴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집 앞에 태권도 학원이 있는데 태권도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온갖 놀이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노는 것도 학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대로 하는 것 같다. 또래끼리 노는 능력은 퇴화되어 간다. 가끔 마을 뒷산에 오르는 데 아이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자랄 때는 뒷산만큼 재미있는 놀이터도 없었다. 두 시대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아이들의 자율성에 관한 한 예전에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세월호 사고 뒤에 매뉴얼에 대한 논쟁이 무성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준비된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군대에서는 'FM대로 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 FM은 Field Manual, 즉 야전교범의 약자다. 미군은 작전할 때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매뉴얼에 세세히 규정해 놓았다고 한다. 실수를 줄이는 방법이다. 잘잘못을 따질 때 매뉴얼대로 했느냐 안 했느냐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사회가 너무 매뉴얼에 의지하는 것도 문제다. 지나치면 인간의 선택 범위가 축소되고, 극단적으로 아예 제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라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선장이나 선원들이 보인 행동은 매뉴얼의 있고 없고의 여부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런 경우 매뉴얼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매뉴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기심, 생명 경시, 물신경배에 매몰된 사회가 아니라면 매뉴얼이 없더라도 발생할 수 없었던 참사였다.

 

너무 매뉴얼을 따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각박함과 모순을 모면하려는 미봉책일 뿐이다. 그보다는 근원적인 문제를 짚어야 한다. 문서로 만드는 매뉴얼이야 세계에서 제일 훌륭하게 꾸밀 수도 있다. 멋진 매뉴얼이 있다고 안전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이 살 만한 나라가 못 되니 자꾸 매뉴얼만 풍성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 시스템으로 규정하고 규제하려는 것이다.

 

가장 매뉴얼이 발달한 조직이 군대다. 군대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법과 매뉴얼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공동체다. 명령과 규율로 작동되는 세상은 아니다. 공자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행해도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라는 말로 인격의 완성을 표현했다. 완전한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 사회는 법과 매뉴얼이 넘쳐난다. 이젠 개인의 생활에까지 매뉴얼에 의지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삶이 점점 규격화되고 타율적이 되는 건 우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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