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일색변 / 조오현

샌. 2014. 7. 16. 09:11

1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소리 들을라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2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3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沒弦琴)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4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소리 들을라면

 

언제 어디서 봐도

거문고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5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6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

중놈소리 들을라면

 

취모검(吹毛劍) 날 끝에서

그 몇 번은 죽어야

 

그 물론 손발톱 눈썹도

짓물러 다 빠져야

 

7

 

세상을 산다고 하면

부황이라도 좀 들어야

 

장판지 아니라도

들기름을 거듭 먹어야

 

그 물론 담장 밖으로

내놓을 말도 좀 있어야

 

8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을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

 

- 일색변(一色邊) / 조오현

 

 

스님의 죽비 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나는 너무 경망스럽고 자잘하다. 멀고 멀었구나, 내 가야 할 길이....

 

* 일색변(一色邊); 일색나변(一色那邊)의 준말, 청정 일색의 경계

* 몰현금(沒弦琴); 줄 없는 거문고

* 진겁(塵劫); 티끌처럼 많은 시간

* 취모검(吹毛劍); 머리카락을 올려 놓으면 잘리는 칼. 부처님의 지혜를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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