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샌. 2014. 7. 31. 07:46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나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왔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나?

줄잡아 몇만 평도 넘을 텐데

무슨 돈으로 그 넓은 땅을 다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현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그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울고 있다

 

- 시집보내다 / 오탁번

 

 

시집 한 권 손에 들 때 마음에 드는 시 한두 개만 만나도 만족이다. 어쩌다 대여섯 개를 만나면 땡 잡은 기분이다. 이번에 나온 오탁번 시인의 시집 <시집보내다>가 그렇다. 오 시인의 시는 재미있고 유머러스하다. 삶의 정곡을 찌르면서도 잰 체하며 무게를 잡지 않는다. 일흔이 넘었지만 마음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시에서 시인의 품성이 그대로 읽힌다. 얽매임이 없고 담백하다. 세상사에서 한 발을 뺀 자의 여유가 있다. 시인은 10년 전에 귀향하여 제천에서 살고 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농촌의 현실과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관심이 시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인의 예민한 촉수가 감지하지 못 할 리가 없을 텐데....

 

<시집보내다>에서 몇 개의 시를 더 골라 본다.

 

 

텃밭에 마늘 두 접을 심었다

친환경 유기농 퇴비와

복합비료를 잘 뿌려주고

육쪽 마늘을 정성껏 심었다

마늘밭 이랑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솔잎을 긁어다가 덮었다

겨우내 눈 쌓인 마늘밭을 보면서

비닐 대신 괜히 솔잎을 덮어

마늘이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솔잎을 헤치며

강보에 싸인 아기 손가락 같은

여린 마늘싹이

하나도 죽지 않고 쏙쏙 돋아났다

금빛으로 빛나는 마늘밭을

아침마다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꽃샘추위 매서운 날

농사짓는 초등학교 동창이 왔길래

마늘밭 자랑을 한참 했다

- 야, 마늘밭 좀 봐! 너무 멋지지?

허지만 녀석은 싱겁기만 하다

- 마늘밭이 다 그렇지 뭐!

우리가 주고받는 엉뚱한 말에

앞산 진달래가

꽃봉오리 터뜨린다

 

- 마늘밭 / 오탁번

 

 

눈 오시는 날

밖을 가만히 내다본다

넉가래로 눈 치우느라 애를 먹겠지만

그거야 다음 일이다

그냥 좋다

눈을 맞는 소나무가 낙낙하다

대추나무는 오슬오슬 좀 춥다

대각선으로 날리던 눈발이

좀 전부터 허공에서부터 춤을 추듯

송이송이 회오리치며 쏟아진다

ㅅㅅㅅ, ㅎㅎㅎ, 소란스레 눈소리 들린다

메숲진 앞산 보이지 않는다

내내 함박꽃처럼 내리는 눈을

그냥 무심히 내다본다

눈길에 운전하느라 애를 먹겠지만

그거야 다음다음 일이다

그냥 좋다

눈 오시는 날

 

- 눈 오시는 날 / 오탁번

 

 

태백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자작나무 숲이 손 흔드는

삼수령을 지나면

고랭지배추밭이 하늘보다 푸른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 마을에

야릇한

버스승강장이 하나 있었다

'버스승강장 권상철집앞'!

근처에 딱히 표시할 만한 것이 없어

개울 건너 토박이 농부의 이름을 딴

버스승강장 팻말이

길가에 앙바틈히 서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아간 상사미 마을

권노인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이름으로 바뀐

버스승강장을 보자

가슴이 찡해졌다

'버스승강장 권춘섭집앞'!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유산인 듯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한

버스승강장 팻말이

검룡소 물 흐르는 개울가에

허아비처럼 서 있었다

 

- 버스승강장 / 오탁번

 

 

평소에 김흥수 화백의 기록을 깨려고 맘먹었다

40년 연하의 여제자와 신방을 차린 것!

다들 배 아파하던 로맨스를 나도 꼭 해보고 싶었다

아예 50년 차로 나이를 벌려

하는 김에 아주 더 벌려

세계기록을 세우려고 꿍꿍이셈을 했다

산수유와 가시오가피에 인진쑥까지 먹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아뿔싸!

2010년 12월 27일(월) 외신들이 전하는

뉴스 한 토막!

Playboy Hugh finds new playgirl!

플레이보이 창업주 휴 해프너(84)가

60년 연하의

크리스털 해리스(24)와 약혼을 했다는 뉴스가

내 뒤통수를 때린다

 

신기록을 세우려면 최소 61년 연하의

아리따운 소녀를 점찍어야 한다!

그럼 올해 그 아이는 겨우 일곱 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갈 나이?

굼뜬 동작에다 때는 일락서산

죽도 밥도 안 된

내 인생아!

 

- 아뿔싸! / 오탁번

 

 

평균 수명 채우려면 앞으로 10년,

살아온 날 생각하면

10년이야

눈 깜짝할 사이인데,

참 이상하다

겨우 10년밖에 안 남은 세월이

무한대無限大로 느껴진다

백수白壽하고 싶니?

참 뻔뻔스럽다

 

그렇다 뻔히 보인다

짧고 굵게!

젊은 날의 숱진 맹세 죄다 까먹고

흐지부지 살아온 나는

앞으로 어느 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또 이럴 것이다

곧 사윌 목숨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남아 있는 내 생애가

은하수 물녘까지 뻗칠 거라고

개꿈을 꿀 것이다

뻔하다

 

- 개꿈 / 오탁번

 

 

젊은 날 술집에서

유두주乳頭酒 마시며 희떱게 논 적 있다

위스키 잔에다

아가씨 젖꼭지 담갔다가

홀짝 단숨에 마시고는

팁으로 배춧잎 뿌린 적 있다

독한 위스키에 취한

오디빛 젖꼭지의

도드라진 슬픔은 모른 채

내 젊음의 봄날이

깜박깜박 반짝이는 불빛에

만화방창 활짝 핀 적 있다

 

이순耳順 지나 종심從心이라

일락서산 끄트머리에서

콧속 유두종乳頭腫 수술을 받았다

이비인후과에 난생처음 가서

내시경 진찰을 받았는데

콧속에 딱 젖꼭지 모양으로 생겨먹은

혹이 있었다

수술받고 내내 코피를 쏟다가

문득 젊은 날 마신

유두주가 떠올랐다

그때 그 아가씨의 젖꼭지가

콧속으로 들어와서

숨을 막으며 벌주는 것일까

유두주 죗값 치르는

피 흐르는 봄날!

 

- 봄날 / 오탁번

 

 

- 내가 왜 좋아?

- 그냥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 내가 왜 좋아?

- 그냥

 

나도

이 말 한번 해봤으면!

 

- 그냥! / 오탁번

 

 

우리는 너무 빨리 사랑을 하고

너무 빨리 이별을 하네

눈꼬 보러 가는 늙은 농부처럼

미꾸리 잡아먹던 두루미가

문득 심심해져서

뉘엿뉘엿 날아가는 것처럼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다면!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처럼

쏜살같이 빠르게는 말고

능구렁이가 호박넌출 속으로 숨듯

허수아비 어깨에 그림자 지듯

느려터지게는 말고 그냥 느리게

 

한평생이라야

구두끈 매는 것보다 더 금방인데

우리는 너무 빨리 이별을 하고

너무 빨리 사랑을 하네

이메일 메시지야

한 손가락으로 단숨에 지울 수 있지만

수많은 새벽과 노을녘은

눈썹처럼 점점 또렷해지는데

메뚜기 떼 호드득호드득 뛰는

고래실 고마운 논배미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꾀 중에서는 제일인데 말이지

 

- 이별 / 오탁번

 

 

1

조장鳥葬터에서

살코기 맛나게 드셨는지

설산雪山을 배경으로

솔개 한 마리가 정지비행을 한다

슬로비디오 필름이

뚝 멈춘다

 

2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는 티베트 사람들이

정녕 사람이라면

나는 한 마리 짐승이다

먹이를 쫓아 아무나 흘레붙는

몹쓸 짐승이다

더는 사람이 아니다

 

3

조캉사원 향로香爐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 나는, 아니다 / 오탁번

 

 

우주 탄생에서 현재까지

백 몇십억 년을

1년짜리 달력으로 환산하면

우주는

1월 1일 0시에 탄생했고

지금 이 순간은

12월 31일 밤 12시다

 

태양의 생일은 9월 9일

지구 생일은 9월 14일이다

성탄절 전야에 태어난 공룡은

12월 28일에 멸종됐고

인간은

12월 31일 밤

10시 30분에 태어났다

문자가 발명된 것은

15초 전의 일이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꿈꾸는 나!

너, 엿 먹어라

 

- 우주달력 /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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