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헛똑똑이의 시 읽기

샌. 2014. 8. 10. 08:17

고려대학교출판부에서 펴낸 오탁번 시인의 시론이다. 내용이 딱딱하지 않고 쉬우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좋은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여러 시를 예로 제시하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시어의 선택을 굉장히 중시한다. 시인이 되려면 정확한 우리말 쓰기와 함께 심상에 맞는 어휘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는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로 시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오 시인은 미당 서정주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데 시는 시 자체로만 봐야지 시인의 인간됨이나 행적은 시 감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시인을 몰라야 시가 바로 읽힌다. 글쎄, 이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기가 힘들다. 시 작품과 시인을 과연 별개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시인의 삶과 괴리된 시가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올바른 현실과 역사 인식을 갖지 못한 시인을 존경할 수 있을까? 독자가 시인의 삶을 보고 실망한다면 더 이상 시가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시가 말장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거나, 시는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헌사라는 말에는 밑줄을 그었다. 오 시인의 작품이나 글에는 순수한 동심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편안해지고 절로 흐뭇한 미소가 인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 시인이 고른 좋은 시를 만나는 기쁨이 크다.

 

시인이 추천하는 좋은 시 중 하나, 손택수의 '옛이응'이다.

 

이응에 꼭지 하나 달아주고 싶다

 

옛 이응, 탯줄 잘못 잘라

볼록하니 튀어나온 배꼽

끝에선 젖내가 난다

응앙응앙 젖꼭지 물고 우는 아가와

엄마의 뽀얀 살냄새가 난다

이응 이응 잘린 꼭지를 따라가면

한 천 평 되는

방울토마토 밭이 나올 것 같고

주근깨투성이 딸기밭과

풋사과 밭 풋냄새와

호박잎 위에서 또록또록

여물대로 여문 이슬밭이 펼쳐질 것도 같은데

꼭지를 쥐고, 헤

혀끝에 욕심껏 올려놓는 모음

모음의 모음

학원 고전문법 시간

이제 알겠냐, 옛이응 응?

칠판을 두드리고 돌아서면

고단한 아이들 모두 졸고 있다

이응의 젖꼭지 물고 옛, 옛 꾸벅이고 있다.

 

- 옛이응 / 손택수

 

시가 귀엽고 재미있다. 일상의 사물들이 마치 유리에 쏟아 놓은 수은방울이 서로서로 붙었다가 떨어지고 또 붙으며 빛을 발하듯 황홀하다고 오 시인은 평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낯선 사유적인 말로 치장하면서 위선이나 위악을 일삼은 시는 잡종이요 사이비며 나쁜 시라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좋은 시는 일상의 진솔한 체험에서 나온, 재미있고 유머러스하면서 페이소스를 감추고 있다. 어렵거나 관념적이면 자격이 없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좋은 쉬는 쉽다.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헛똑똑이의 시 읽기>는 시를 친구로 삼아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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