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높고 푸른 사다리

샌. 2014. 11. 20. 09:40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고 신에게 묻는다. "하느님 대체 왜입니까?" 이 질문은 <높고 푸른 사다리>의 주제이기도 하다. 토머스 수사도 고난의 시기에 수없이 물었다. 토머스 수사는 같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요한 신부의 말을 통해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 시련을 다 이긴다 해도, 우리가 심지어 여기서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고 해도, 아니 자네와 내가 여기서 이 모든 사람을 무찌르고 탈출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 시련을 사랑이 아니라 악으로 참아내는 거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라네. 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시련을 수락했네. 하느님께 예, 하고 말씀드렸어. 나는 알았네. 저들이 우리에게 빼앗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우리에게 억지로 준 이 고통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 사랑에게 봉헌한다는 것이네. 그건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우리는 참으로 존귀하며 우리는 이 모든 우주의 주인인 분이 특별히 지어내신 귀염둥이들이 아닌가 말일세. 이 짧은 세상이 끝나고 설사 죽어보니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저들과 나 둘 중 어떤 역을 맡겠냐고 묻는 신에게 저들처럼 학대하는 역을 맡지는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걸세. 그러자 모든 고통의 의미가 내게로 다가왔네. 나는 적어도 무의미의 고통에서는 벗어났네."

 

토머스 수사는 네 번의 겨울을 더 버티고 서독 정부의 손길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시련의 기간에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만 서른여덟 명이 순교했다. 그 뒤 토마스 수사는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었고 왜관 수도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두 번째는 마리너스 수사 이야기다. 마리너스 수사는 함흥 철수 때 피난민을 구한 수송선 빅토리아메리더스호 선장이었다. 전쟁에 쓰일 기름을 흥남에 하역하려다가 상황이 급박해지자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부두로 몰린 피난민을 싣게 된다. 선장의 결단으로 무려 14,000명을 무사히 거제도로 이동시켰다. 이분은 뒤에 가톨릭 수사가 되었고, 지원자가 없어 폐쇄 위기에 처한 뉴튼 수도원을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이 인수함으로써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이 세상에는 신의 섭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소설은 요한 수사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소희와 사랑에 빠지는 일부터 시작해서 이후에 벌어지는 과정은 너무 작위적이고 어색하다. 종신서원을 눈앞에 둔 수사의 사랑 이야기로는 뭔가 부족하다. 수사의 사랑이 범부의 사랑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길과 신의 길 사이에서 번민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요한 수사보다는 미카엘과 안젤라 수사에게서 인간적이면서 고뇌하는 수도자의 길을 보게 된다.

 

공지영 소설가는 현실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작가다. 그러면서 종교와 인간 영혼을 다루는 이런 소설을 써주는 게 고맙다. 소설 중에 나오는 이런 대목이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인 것 같다.

 

"우리는 '주여 왜?'라고 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운명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이름 모를 불치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죽어가는 갓난아이 앞에서, 우리는 신에게 물을 수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고. 동시에 우리는 또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으며 질문해야 한다. 독재 앞에서, 불의한 권력자 앞에서,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는 그 현장 앞에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박탈하는 자본가 앞에서, 가난하기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갓난아이 앞에서 '대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그저 무심히 참아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견딜 수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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