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녹두장군 전봉준

샌. 2014. 12. 5. 10:30

올해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자가 지난 120년이 되는 해다. 1894년 1월에 전봉준 장군 주도로 고부 봉기가 일어났고, 4월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곳곳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1월 우금재 전투에서 패배하며 혁명은 좌절되었고, 12월에 전봉준 등 농민군 주도자가 체포되고 이듬해 3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책 <녹두장군 전봉준>은 역사학자 이이화 씨가 쓴 전봉준 전기다. 시대에 반항한 패배자여서인지 전봉준에 대한 사료는 재판 기록 외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는 출생지나 가족 관계도 불분명하며 사후에 그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에 자료가 소멸된 것이다. 이이화 씨는 현장을 답사하며 민중의 입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서 전기를 썼다.

 

전봉준은 싸움패가 아니라 부드러운 평화주의자였다는 건 새롭게 알게 되었다. 김개남이 강경파였다면 전봉준은 살생을 조심한 온건파였다. 부자에게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도 윽박지르기보다는 설득해서 스스로 내게 했고, 부정한 벼슬아치나 수령들도 칼로 단죄하기보다는 꾸짖고 타이른 경우가 많았다. 그는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꿈을 이룰 시대 환경이 아니었다. 잘 조직되고 훈련되지 못한 내부의 문제점도 있었지만, 일본이라는 신흥 강국이 개입한 마당에 혁명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일본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사형장으로 갔다. 불의한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혁명의 길에 나섰던 한 인간의 모습이 이 책에 그려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동학사상이 기본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학군은 실제로 신분 해방과 평등을 실천하고 있었다. 존비와 귀천을 떠나 서로 호칭을 접장이라 부르며 맞절을 했다. 전봉준을 부를 때도 "전봉준 접장"이었고, 어린이나 부녀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령들은 졸개를 보면 먼저 절을 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런 실천은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집강소에서 농민군이 실시한 개혁 정책을 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드러난다. '폐정개혁 12조항'은 이렇다.

 

1.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혐의를 깡그리 쓸어버리고 여러 정사에 협력할 것

1.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낱낱이 엄하게 징벌할 것

1. 횡포한 부호의 무리는 엄하게 징벌할 것

1.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는 엄하게 징벌할 것

1. 노비문서는 불태워 없애버릴 것

1. 칠반천인(七般賤人, 일곱 종류의 천한 사람)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이 쓴 평량입(平凉笠, 패랭이)은 벗길 것

1. 청춘과부에게는 개가를 허락할 것

1. 무명의 잡세는 일체 부과하지 말 것

1.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 지역 연고)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하게 징벌할 것

1. 공사의 채무를 가리지 말고 기왕의 것은 소멸시킬 것

1. 토지는 골고루 나누어 짓게 할 것

 

이는 조선이라는 신분 사회에서 억눌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인권선언에 다름 아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조선 사회를 향한 칼날이었다. 전봉준이 재판 받을 때 법관과 주고받은 문답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무라는 법관을 향해 전봉준은 "네 어찌 감히 나를 죄인이라 이르나뇨?"라고 호통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 없는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동학은 '사람을 하늘이라'하니, 과격하다 하여 금한단 말이냐? 동학은 과거 잘못된 세상을 고쳐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선 것이라,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이 평등하게 대우받도록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탕하고 삿된 일에 소비하는 국세와 공금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여러 사람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우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적 토지를 사사로운 토지로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 원리에 위반이라,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정부를 만들고자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들였나니 네 죄가 가장 중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전봉준의 사자후는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공통된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기개가 있어야 영웅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가 간디처럼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동학이라는 이념에도 맞았고 실패했더라도 민중에 미친 영향이 무장 투쟁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비폭력은 약자가 상대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가운데 판결이 내려졌고 전봉준을 포함한 농민군 다섯 지도자는 바로 처형되었다. 죄명은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이라는 긴 이름이었다. '군복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하여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라는 뜻이다. 전봉준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소회를 담은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한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誰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가니 영웅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백성 사랑하는 올바른 의리 나 실수 없었노라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 누가 알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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