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시인 공화국 / 박두진

샌. 2014. 11. 26. 14:01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한

어쩌면

아무래도 이 세상엔 잘못 온 것 같은

외따로운 학처럼 외따로운 사슴처럼

시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안다.

 

실로

사자처럼 방만하고 양처럼 겸허한

커다란 걸 마음하고 적은 것에 주저하고

이글이글

분화처럼 끓으면서 호소처럼 잠잠한

서슬이 시퍼렇게 서리어린 비수,

비수처럼 차면서도 꽃잎처럼 보드라운

우뢰를 간직하며 풀잎처럼 때로 떠는,

시인은 그러면서

오롯하고 당당한

미를 잡은 사제처럼 미의 구도자,

사랑과 아름다움 자유와 평화와의

영원한 성취에의 타오르는 갈모자,

그것들을 위해서 눈물로 흐느끼는

그것들을 위해서 피와 땀을 짜내는

또 그것들을 위해서

투쟁하고 패배하고 추방되어 가는

아 현실 일체의 구속에서

날아나며 날아나며 자유하고자 하는

시인은

영원한 한 부족의 아나키스트들이다.

 

그 가난하나 다정하고

외로우나 자랑에 찬

시인들이 모인 나란 시의 공화국

아 달처럼 동그란

공화국의 시인들은 녹색 모잘 쓰자.

초록빛에 빨간 꼭지

시인들이 모여 쓰는 시인들의 모자에는

새털처럼 아름다운 빨간 꼭질 달자.

그리고, 또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얼마든지 휘날리면 하늘이 와 펄럭이는

공화국의 깃발은 하늘색을 하자.

그렇다 비둘기....

너도 나도 가슴에선 하얀 비둘기

푸륵 푸륵 가슴에선 비둘기를 날리자.

꾸륵, 구, 구, 구, 꾸륵!

너도 나도 어깨 위엔 비둘기를 앉히자.

힘있게 따뜻하게,

어깨들을 겯고 가면 풍겨오는 꽃바람결,

우리들의 부른 노랜 스러지지 않는다.

시인들의 공화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눈물과 외로움과 사랑으로 얽혀진

희생과 기도와 동경으로 길리어진

시인들의 나라는 따뜻하고 밝다.

 

시인이자 농부가 농사를 한다.

시인이자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

시인이자 직조공이 직조를 한다.

시인이자 공업가가 공업을 맡고,

시인이자 원정, 시인이자 목축가, 시인이자 어부들이,

고기 잡고 마소 치고, 꽃도 심고, 길도 닦고,

시인이자 음악가, 시인이자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시인들이 모여 사는 시의 나라 살림을,

무엇이고 서로 맡고 서로 도와 한다.

 

시인들과 같이 사는,

시인들의 아가씨는 눈이 맑은 아가씨,

시인들의 아가씨도 시인이 된다.

시인들의 손자들도 시인이 된다..

아, 아름답고 부지런한

대대로의 자손들은

공화국의 시민,

시인들의 공화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눈물과 고독, 쓰라림과 아픔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아는,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억누름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착취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도둑질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횡령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증수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미워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시기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위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배신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아첨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모가 없다.

아, 시인들의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피흘림과 살인,

시인들의 나라에는 학살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강제수용소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공포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집 없는 아이가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굶주림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헐벗음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거짓말이 없다.

시인들의 나라에는 음란이 없다.

그리하여 아, 절대의 평화, 절대의 평등,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사랑.

사랑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이웃들을 받드는,

시인들의 나라는 시인들의 비원

오랜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어쩌면,

이 세상엘 시인들은 잘 못내려온 것일까?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

아무데도 이 땅위엔 시인들의 나라일 곳이 없다.

눈물과 고독과 쓰라림과 아픔,

사랑과 번민과 기다림과 기도의,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아는,

시인들의 이룩하는 시인 공화국,

이 땅 위는 어디나 시인들의 나라이어야 한다.

 

- 시인 공화국 / 박두진

 

 

최근에 유니세프에서 만든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세계 유명 인사들이 존 레논의 '이매진'을 한 토막씩 부른 것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후세에 물려주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매진'이 그리는 세상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꿈꾸는 것까지 포기한다면 세상은 파멸을 향한 질주를 가속할 것이다. 영혼 없는 좀비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세상이 어디로 갈지 정말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40년은 될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시인의 나라를 꿈꿀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가 보다. 이젠 이런 꿈을 꾸는 시인도 찾아보기 어렵다. 워낙 가짜 시인이 창궐하다 보니 시인의 나라란 말조차 오염이 되었다. 세상도 사람의 마음도 그만큼 삭막하고 황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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