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입설단비 / 김선우

샌. 2014. 12. 3. 08:32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은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 입설단비(立雪斷譬) / 김선우

 

 

젊었던 때는 이런저런 환상을 품기도 했다. 유리창 넓은 바닷가에서 밤새 빗소리 들으며 애인과 포도주를 홀짝이거나, 깊은 산골에서 꼼짝없이 폭설에 갇혀 버리고 싶다는 등이다. 이제는 성적인 판타지는 색 바래져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마음 맞는 벗과 만나 시인의 바람처럼 '겨울 속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고는' 싶을 뿐이다. 자신의 팔뚝을 잘라 공부하기를 청한 혜가의 치열함을 그저 아득히 바라보고 흠모하고만 싶은 것이다. 듬성듬성 눈을 인 소나무 성성하고, 등교하는 아이들 목소리 맑은 눈 내린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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