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1)

샌. 2015. 9. 6. 09:27

 

중학생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열다섯 해를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부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만났을 뿐,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철없던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고마움을 몰랐다. 오히려 투정을 많이 부렸다. 내가 그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손주를 돌보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를 안다. 나만이 아니라 동생 넷도 전부 객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컸다.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백수를 하셨으니 장수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백 세를 넘기신 분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서 모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했다.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큰 은혜를 입었건만 내 집에 모시고 따뜻한 밥을 해드리지도 못했다. 외손주는 키워봐야 쓸데없다더라는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그대로 실천했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딸 셋을 낳고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신 외할머니는 억척같이 살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그리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정에 허기지신 분이었다. 치매 중에 제일 많이 찾은 것도 사람이었다. 늘 유리창을 내다보며 사람을 기다렸다. 딸이 눈에 안 띄면 온 동네를 찾아 돌아다녔다. 사람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외할머니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면서 형벌이다. 그리움의 근원은 외로움이다. 외롭기 때문에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한다. 많은 사람은 진흙탕에 빠지듯 허우적대다가 일생을 마친다. 예외는 별로 없다.

 

외할머니는 자존심도 강했고 돈에 대한 집착도 컸다. 그것 때문에 동생과도 오랫동안 의절된 상태로 지냈다. 젊어서 혼자 되어서 믿을 것은 돈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든든한 백은 현금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적든 많든 누구나 다 그런 전철을 밟는 것 같다. 외할머니는 한 줌 재로 변해 고향 선산에 뿌려졌다.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저 손으로 해주신 밥을 먹고 나는 성장했다. 다른 무엇보다 고마운 손이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전해드리지 못했다. 외할머니 손에 낀 닳은 은반지를 보니 가슴이 아리다. 금반지 하나라도 직접 끼워드렸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늘나라에서는 조금이나마 서운함을 더셨을까. 우리는 한 사람에게서 받은 신세를 당사자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갚도록 된 모양이다. 그때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유년기에 있는 내 손주를 보며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그 빚을 대신 갚으라고 손주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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