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깡통 / 곽재구

샌. 2016. 1. 30. 17:39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 깡통 / 곽재구

 

 

30년 전에 쓰여진 시다. 오락이나 드라마로 국민의 시선을 화면에 묶어두려는 정권 차원의 의도가 의심되던 시절이었다. TV는 생겨났을 때부터 '바보상자'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러나 TV는 이제 초창기만 한 영향력이 없다. 국민을 깡통으로 만들 만큼 힘이 세지 않다. 다만 정권의 눈치를 본다는 점에서 TV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공영 방송은 모든 계층의 의견을 공정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눈이 없다면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는 빈 깡통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깡통은 자신이 깡통인지도 모른 채 허공으로 날아간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0) 2016.02.11
소스라치다 / 함민복  (0) 2016.02.04
뻔디기 / 서정주  (0) 2016.01.23
솔개 / 김종길  (0) 2016.01.18
큰일이다 / 이상국  (0) 201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