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빅 퀘스천

샌. 2016. 5. 14. 09:51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과 교수인 김대식 선생이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답을 한 책이다. '빅 퀘스천(Big Question)'이라는 제목이 어울린다. 뇌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은 뇌과학과 뇌공학,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책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등 31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각 항목이 심오한 철학적 주제로 하나만으로도 책 수십 권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 지은이는 역사, 신화,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흥미롭게 이 난해한 주제를 다룬다. 바탕에는 과학적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자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빅 퀘스천>은 해답을 준다기보다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밝히는 것은 관념적인 철학의 논설이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의 눈으로 본 결과물이다. 새로운 발상에 무릎을 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인간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다.

 

책은 '31가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런 질문에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관을 결정한다고 본다. 표피적 현상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은 이런 본질에 관한 질문과 사색을 잃어 버렸다. 잊어버린 질문을 다시 되살려주는 좋은 책이 현대인의 교양 서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내용 중 몇 개 항목의 결론 부분을 추려 보았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현대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인간은 모험과 탐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지 모른다. 지금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면, '다음'이 없는 '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섭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존재가 끝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파이어니어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는 오래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확신한다. 우주에는 끝이 없으며, 모든 끝은 또 다른 새로움의 시작이라고. '그 다음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끝은 없다고.

 

친구란 무엇인가

나와 공감하는 나의 친구들은 어쩌면 나의 '아바타'일 수도 있겠다. 키케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친구는 또 하나의 나"라고. 먼 옛날 아늑하고 작은 동아프리카 숲을 등지고 지구를 정복하기 시작한 인간. 새롭고 넓은 세상에서 발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안함과 무의미로부터, 우리는 어쩌면 '친구'라는 또 하나의 나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영생의 비밀을 손에 잡았다 놓친 길가메시는 울부짖으며 우트나피쉬팀에게 묻는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왜 살아야 하느냐고. 우트나피쉬팀은 말한다. 길가메시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시 집에 돌아가 원하는 일을 하며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거라.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종종 만나 맛있는 것을 먹고 술도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라. 비틀즈의 존 레논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길가메시야,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란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보편성은 플라톤의 '고매한' 이데아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화'라는 긴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눈을 뜨고 장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수천만 년 동안 태어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실망하고 사라진 우리들 모두의 조상과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

스피노자는 우리가 2+2=5가 아닌 필연적으로 2+2=4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필연적인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벽한 텔로머라아제 또는 완벽한 뇌 복사 같은 과학적 '엘리우시스의 신비'들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는, 죽음이 꼭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슬퍼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당장 누릴 수는 없지만 수백 또는 수천 년 후 누군가 다른 이가 가지게 될 영원한 삶을 질투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이런 말도 가능하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영혼이란 무엇인가

인류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영혼은 발명한 것이다. 영혼은 먼 미래에 지구를 정복하게 될 원시시대 인류가 최초로 개발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영원한가

30년, 50년, 100년 후, 기계가 드디어 정보를 이해하고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의 발명도, 혁신도, 노동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니, 누구도 인간의 노동 혁신 발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든지 기계가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그리고 더 저렴히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10개의 인공지능 회사들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지구는 무한으로 부자가 되겠지만 99% 이상의 사람들은 직업도, 소득도 없어지지 않을까. 지구에서 소득세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단 10명뿐이라면? 100년 후 인공지능 시대에 과연 민주주의가 여전히 존재할지 궁금해진다.

 

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서양은 오늘날 세상을 지배한다. 하지만 서양의 과거는 현재의 논리적 원인이 아닌 포스트훅(post hoc), 그러니까 이미 일이 벌어진 후 제시된 '편한' 해석일 뿐이다. 어쩌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정복인지 모른다. 우연과 가능성들의 합집합인 과거를 재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우리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얻는다. 과거를 소유하는 자만이 무질서한 역사를 질서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가

양자우주론과 진화론이 만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인간에게는 커다란 질문 하나가 남아 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코스모스 식 질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내면의 카오스에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듯하다. 하지만 배경인물에 불과한 우리와 달리 유명인은 사회의 강자이며 공동체의 주연급 인물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불안한 내 마음의 코스모스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타인의 삶을 통해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하찮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인가

137억 년 전 빅뱅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에서 탄생한 우리는 모두 다 같은 고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논리적인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칼 세이건이 말했듯 "우리는 찬란한 별들의 후손"이라고. 정답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정해진 답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소유란 무엇인가

소유의 핵시은 노력과 부족함이다. 하지만 제러미 리프킨이 주장한대로 인류는 어쩌면 이미 '제로 한계비용 사회'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사회의 모든 생산 인프라 그 자체가 거대한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시스템이 된다면, 생산의 한계비용은 거의 '0'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더 이상 추가 노력 없이도 추가 생산이 가능한 미래사회. 책, 정보, 스마트폰이 공기와 마찬가지로 '무료'라면? 개인 소유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 될까? '시장과 경제'의 미래는 무엇일까? 개인 소유가 무의미해진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없는 사회일까?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미래에는 노력도, 그리움도, 실망도, 질투도 없이, 잘 꾸며진 UI(User Interface, 사용자와 컴퓨터 간에 의사 소통을 하는 중계화면)를 통해 오늘 밤의 연인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리움도, 질투도, 실망도 없는 사랑을 여전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사랑은 왜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왜 흐르는가

시간은 존재들 간의 상대적 관계이다. 하지만 무질서적 관계가 질서 있는 관계로 변하기보다 질서가 무질서로 변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우리가 엔트로피 증가를 선험적인 시간 흐름의 방향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지구라는 통곔물리학적 시스템에서 우리 뇌가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이런 주장을 해볼 수 있겠다. 우주 그 자체가 수학이라고.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실체들이 물리학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라는 함수를 계산해내는 컴퓨터의 한 부분이라고. 우리들의 '이해' 그 자체가 우주라고 불리는 컴퓨터 안에서 끊임없이 계산되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함수의 계산 과정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든 시뮬레이션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곳이 정해진 대답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일까? 힌두교는 존재라는 아픔이 끝없이 반복되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에야 그 무한의 반복에서 해방된다고 말한다.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 시뮬레이션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시뮬레이션하는 우주 최고의 '헤커'인지도 모르겠다.

 

정보란 무엇인가

미국 국가안보국 전 직원으로 NSA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 실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아는 '혼자'가 허락된 세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모든 사람의 모든 정보가 수집되고 분석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다고. 정보 사회의 어두운 미래는 구멍 7개가 아닌 100만 개의 구멍이 뚫린 제강과 닮았다. 우리의 모든 정보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하고 독립적인 '나'가 아닌, 질서 속 예측 가능한 '우리'로 전락할 것이다.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

미래의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1,000만 배 더 고차원적인 패턴들을 이해하고, 1,000만 배 더 큰 아픔과 기쁨을 느끼고, 1,000만 배 더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제는 분명해진다. 우리 인류는 앞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라도, 무한으로 깊은 마음을 가질 기계에게 역시 무한으로 큰 자비심을 심는 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인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기계는 지능을 가지는 순간 인간을 공격하고 멸종시키려고 달려든다. 운 좋아봐야 컴퓨터에 연결돼 인간이 여전히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는 꿈을 꾸며 살게 한다. 그래서일까? 세계적 로봇공학자 모라베츠는 주장한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듯, 인간보다 우월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기계들이 선심을 베푼다면 우리는 애완동물 정도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인간은 왜 필요한가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라며 부족한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인간과 달리, 기계는 객관적인 대답을 원한다. 인간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가 인간이 없는 우주보다 무엇이 더 바람직한지. 칸트는 '계몽'을 인간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계몽의 기회가 아닐까. 무능력, 미신, 편견에서 벗어나 기계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현명한 인류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더 이상 계몽을 미룬다면 인공지능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능을 가진 기계가 등장하는 순간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 역시 거기서 끝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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