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무 기도 / 정일근

샌. 2017. 1. 1. 12:36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혀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다 주는 나무로 살고 싶다

새해에는 그대를 위한 나무가 되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나무가 되어다오

우리 나무와 나무로 만나 숲을 만들자

그런 사랑이 만드는 새로운 숲이 되자

 

- 나무 기도 / 정일근

 

 

나이가 들수록 사람살이가 어렵다. 욕심덩어리가 아직 가득 차 있는 탓일까. 나를 버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매시 실감한다. 인생을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면 조금 속이 편해진다.

 

그래도 새해 첫날이니까 나무를 닮고 싶다는 건방진 바람 한 번 품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더해서 이양하의 '나무'를 읽어본다.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不滿足)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 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孤獨)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울고 돌 우는 동짓날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장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자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 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 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厚待)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薄待)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기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默禱)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며,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嚴肅)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 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 소용(所用) 닿은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怨望)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 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廻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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