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 신경림

샌. 2017. 8. 5. 14:17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가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 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 신경림

 

 

지명만 바꾸면 다 같은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여서 더 애틋하다. 그때는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여행조차 마음먹기 어려웠다. 손주 따라 가까운 유원지에 다녀오는 게 유일한 나들이였다. 더 윗대로 올라가면 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외에 나가는 게 이웃 마실 가는 것처럼 쉽다. TV를 보다가 전화 걸고 당장 내일 떠날 수도 있다.

 

생활 동선으로만 따지면 선대의 삶은 좁고 초라하다. 그러나 초라해 보인다고 삶조차 누추했을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모르는 삶의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을 그분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찮다 버리는 것을 그분들은 소중히 여길 줄 알았을 것이다.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우리가 옛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자신할 수 없다.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많은 것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잃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더해진다. 사라진 사람, 골목, 인정들, 그 따스했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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