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기다려 주기

샌. 2017. 9. 29. 19:08

아파트 현관으로 가는데 젊은 여인이 앞에 가고 있다. 이럴 때는 속도를 늦춘다. 먼저 보내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다. 모르는 사람과 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데 복도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왔어요." 내가 뒤에 따라오는 걸 알고 같이 올라가기 위해 기다려 준 것이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대개 뒤에 오는 사람을 무시하고 먼저 올라간다. 나부터도 그렇다. 같이 타게 될까 봐 발걸음을 빨리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닫힘 버튼을 부리나케 누른다. 못 된 짓이란 걸 알지만 그렇게 살아왔다. 사람 기척이 있는데도 미리 가버리는 행위는 얄밉다. 도시에서는 서로가 그런 무례를 주고받으며 산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사람의 온기가 엘리베이터 안을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내 행위를 반성했다. 그래,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 내 마음씀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가 조금 불편하면 된다. 그 여자를 통해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내가 부끄러웠다.

 

어제는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대취했다. 소주를 세 병은 마신 것 같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퍼마시고 마지막에는 시 낭송 모임에 갔다. 모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다. 거기서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것 같다. 손님으로 초대받아놓고는 가짢은 충고와 질책으로 분위기를 망가뜨렸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다는 건지,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술에 취하면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한다. 예전부터의 좋지 않은 주사다. 내 내면에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이 있는 것 같다. 술이 들어가면 폭발한다. 그러니 평소에 타인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생길 리 없다. 인격의 도량이 찻잔만도 못하니 옹졸하다. 늙어도 똑같으니 이것이 슬프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선(善)을 지향하지만 실제로 삶이 변화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지금껏 살아온 결과를 보면 안다.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가망이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하나만은 실천해 보려 한다. 며칠 전의 그 여자가 몸소 보여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기다려 주기다. 이런 작은 것조차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할 수 있다면 하루가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진흙탕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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