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밥 / 정진규

샌. 2017. 10. 25. 10:36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 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지가 한참 되셨을 터이니까

 

- 밥 / 정진규

 

 

지인한테서 밥을 같이 먹자고 연락이 왔다. 웬일인가 물으니 그냥 같이 하고 싶단다. 그러면서 사연을 설명해준다. 아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고 한다. 살아서 그와 식사 한 번 못 한 게 그렇게 한이 되더란다. 그래서 안면이 있는 사람과는 미루지 말고 같이 밥 먹을 기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본인은 그걸 '밥 사' 운동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을 했다. '밥사'가 '박사'보다 더 낫다며 맑게 웃었다.

 

남자들은 "밥 먹자"보다는 "술 한잔하자"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는 데는 술이 효과가 있지만, 깊이 있게 하는 데는 밥이 아니면 안 된다. 두 자리에서 대화의 질이 다르다. 좋은 친구와 간소한 식사를 하며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것은 삶의 행복 중 하나다. 상황에 따라 밥은 구차스럽게 때워야 하는 한 끼니에서부터 성찬식처럼 거룩한 한 숟갈까지 있다. 어느 경우나 밥은 곧 생명이다. 밥에서 부처님과 예수님을 만난다. 오늘은 밥 한 끼의 의미를 되새기면 식탁에 앉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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