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다만 어리석을 뿐

샌. 2017. 12. 4. 10:13

매일 저녁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든다는 한 지인은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자주 토로한다. 사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 과거에 자신이 잘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 괴롭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야 즐겁게 반추할 수 있지만, 하필 후회스럽고 자책할 일만 생각나니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잠 잘 자는 나도 어쩌다 불면의 새벽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상념이 오가는데 옛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인과 마찬가지로 자랑할 일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로 머리가 꽉 찬다. 어떤 때는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추억으로 산다는 데, 노년에 되씹는 추억이 꼭 감미롭지만은 않다.

 

그중에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셋째를 낙태시킨 일이다. 딸 둘을 두고 수년이 지나 아들을 가질 욕심이 생겼다. 아내와도 상의하고 합의해서 아들 낳는 민간요법을 쓰며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아내는 임신을 했고 산부인과에서 성별 체크를 받았는데 딸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당시는 불법이었지만 임신중절까지도 은밀히 해 주는 병원이 있었다. 아내는 낳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내가 반대해서 결국은 태아를 지웠다. 그때는 죄의식도 별로 없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니 낙태는 결국 한 생명을 죽인 참담한 일이었다. 강제 임신이나 불치병 등 불가피한 중절 수술과는 사정이 달랐다. 제가 원해서 한 생명을 잉태시켜 놓고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잘라낸 것이다.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 벌을 어떻게 받을까 두려웠다. 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잠 못 드는 밤이면 가끔 튀어나와 가슴을 치게 만든다.

 

심지어는 작금에 나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이 그 업보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사가 인과응보의 톱니바퀴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아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선배는 대학생일 때 애인을 세 번이나 산부인과 침대에 눕혔다. 졸업하고 나서는 몇 번을 더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 선배는 지금 자식한테 효도 받으며 무지무지 잘 산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꼭 윤리 도덕의 잣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자기 위로를 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어쨌든 무지하고 어리석었다.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태아가 생명체라는 인식도 없었다. 그때는 제 잘났다 했겠지만 지금 돌아보면 미숙하고 어리석었을 뿐이었다. 30년 전의 그런 나를 지금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너무 과거의 잘못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인생은 본래 실수투성이다. 하나하나 자책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하면 어느 정도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선인이나 악인이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은 다만 어리석을 뿐이다.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 역시 다르지 않다.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모두 탐(貪), 진(嗔), 치(恥)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의 차이는 오십 보 백 보일 뿐이다. 가식이 진실을 오래 덮지는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비틀대면서 어두운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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