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샌. 2017. 12. 1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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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중학생 때였던가,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이 전체 스펙트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과학 시간에 배우고 엄청 가슴이 뛰었다. 만약 X선에 반응하는 시각 신경을 가진 생물체가 있다면 우주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게 될 것이다. 우주는 다양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계의 상대성을 그 시절에 나는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못 듣는 소리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땅이 내는 소리를 감지하고 지진이 나기 전에 대피하는 동물도 있다고 한다. 우리의 청각 능력 밖에 있어서, 또는 작다고 무시해 버리고 묻혀지는 소리들. 우리가 감지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의 만 분의 일도 되지 못할 것이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도 하나의 세계다. 이 우주에는 인간이 접촉하지 못하는 무수한 세계가 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존재계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이 인류의 미망을 걷어냈지만 그래서 더 현명해진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교만해진 지식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 모른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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