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샌. 2017. 12. 5. 10:39

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시골에 내려가 소식 끊고 지내는 동기가 셋이나 된다. 가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끊고 세상사에 초연한 은둔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렇지만 먼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해 보지 못했다. 빗자루에 쓸려 버려져도 좋다고 한다.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어차피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이다. 살아 애착이 다 부질없어라.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은 채,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고 싶다. 먼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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