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래된 농담 / 천양희

샌. 2017. 12. 11. 10:20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아내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남편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 그늘보다 더 더 깊고 서늘했다

 

- 오래된 농담 / 천양희

 

 

이 세상에는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추한 것은 없다. 아름답거나 추하게 만드는 건 사람의 몫이다. 나이 드는 것은 누구나 똑같지만 어떻게 늙어가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곱게 늙어가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긴 세월을 휘저었을 기쁨과 슬픔이 농익어 여기까지 왔다. 새로 사귄 애인의 농담이 이처럼 깊고 서늘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저녁 서산에 걸릴 노을도 고울 것 같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맑은 웃음 / 공광규  (0) 2017.12.23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0) 2017.12.17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0) 2017.12.05
나목 / 신경림  (0) 2017.11.29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0) 201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