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샌. 2017. 11. 24. 09:29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춸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내려간 동생이 집을 지을 때 옛 담장을 허물었다. 경계는 있어야 한다고 말렸지만, 동생은 담장이 없는 게 실용적이라며 시원하게 없앴다. 없는 게 낫다는 걸 허물고 나서야 알았다. 동네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붙어 있는데, 담장이 없으니 동네 길이 넓어지고 집도 넓어졌다. 시야가 환해진 것은 물론이다.

 

집 담장을 허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마음의 담장이다. 마음의 담장은 보이지 않는다. 철조망을 치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꽂아두고도 흉한 줄을 모른다. 나이 들면서 성숙해진다는 것은 제 담장을 허무는 작업이 아닐까. 그런데 어쩌랴, 늙어가면서 점점 마음의 담장은 높아간다. 이젠 내 키를 넘어서 아예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몇 평 오두막의 성주가 되기 위하여 나는 자꾸 담장을 쌓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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