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민지의 꽃 / 정희성

샌. 2018. 1. 3. 20:51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민지의 꽃 / 정희성

 

 

순백의 지순한 마음을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걸 다, 꽃이야, 라고 부르게 될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어른은 "그게 뭔데?"라고 묻지만, 아이는 "꽃이야"라고 대답한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한 대목 같다. 하늘나라를 멀리서 찾지 마라. 어쩌면 그대 마음속에도 가만 숨죽이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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