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샌. 2020. 9. 18. 11:28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으니 1980년대 초반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는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드물었다. 학교 앞에 있는 동그랑땡 집에서 소주를 적당히 마신 뒤, 대개 입가심으로 한 잔 더 하자면서 호프집으로 가는 게 정해진 코스였다. 호프집 안주는 보통 노가리와 마른안주였다. 그날은 교감이 동행했고 역시 순서대로 이차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교감은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M 중학교에 부임해 왔다. 교감과 함께 있으면 술자리의 화제는 자연히 일본 얘기가 많았다. 교감은 일본으로부터는 배울 게 많다는 걸 늘 강조하는 지일파였고, 일본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날은 일본 문화 얘기를 하다가 흥이 났는지 일본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일제 강점기 때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로 시작해서 엔카로까지 몇 곡이 이어졌다.

 

옆 테이블에는 청년 서넛이 앉아 있었다. 일본 노래가 들리니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교감이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나직이 부르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의 청년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XX, 선생이 왜놈 노래를 막 불러도 되는 거야?"

우리가 어리벙벙해 있을 때, 다혈질인 체육 선생이 맞받아쳤다.

"왜? 선생은 왜놈 노래 부르면 안 돼냐? XX."

 

둘이 엉겨 붙으면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들었다. 테이블이 쓰러지고 몇 사람은 바닥에 뒹굴었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리다가 안경이 떨어졌고, 누군가의 발에 밟혀 박살이 났다. 다행히 주먹다짐까지는 가지 않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주인장이 화해를 시켰고, 양쪽은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상황이 정리되고 보니 내 안경만 없어진 꼴이 었다. 싸움판에는 섣불리 끼어들지 말 것! 이것이 그때 안경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이었다.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나 싶을 정도로 깊다. 팝송은 자랑스럽게 부르면서 엔카는 눈치 보며 불러야 한다. 현 정권이 국민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서 지지층을 결집한다는 비판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국민 하나하나는 친절하고 상냥한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다른 것 같다. 가까이하고 싶어도 영 밉상인 나라다. 이렇게 된 데는 정치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트로트와 일본의 엔카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둘의 차이점을 찾는 게 더 어렵다. 일본 문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개방된 거로 아는데 국내 무대에서 일본의 엔카 가수를 만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트로트 가수는 여럿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좀 더 마음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1980년대와 지금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황이 변했다. 케이팝 열풍은 세계를 휩쓸고 있다. 그때 청년들의 의기를 높이 사지만, 반일감정도 우리가 넘어야 할 극일(克日)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트로트와 엔카의 합동 공연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에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영화 제목이 노래 가사인 '아루이떼모 아루이떼모'에서 따온 것이다. 이 노래는 나온 지가 50년이 넘었다. 벌써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싶다. 노래 분위기와는 다르게 나는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들으면 호프집에서 우당탕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는 얼굴의 안경으로 손이 간다. 이것도 조건반사의 하나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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