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마음대로 안 된다

샌. 2020. 10. 16. 15:34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연락해서 아쉬움을 전했더니 대답이 쿨하게 왔다.

"올해 못 가면 내년에 가면 되죠, 뭐."

"야, 우리한테는 내년을 기약할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내년까지는 괜찮을 거예요."

 

내일을 확신하는 말투를 보니 역시 젊다는 게 다르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나이 들고 보니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내년에 가면 되지 뭐, 라는 마음이 쉽게 들지 않는다. 젊었다면 속이 부대낀다고 쉽사리 설악산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이 되면 체념이 빠르지만 미련은 커진다. 그것이 젊은이와 다른 점이다.

 

계획을 세우지만 틀어지는 빈도가 점점 늘어난다. 첫째 원인은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하룻밤 안 자더라도 끄떡없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조금만 무리해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 속에는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마음과 몸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게 노년이다. 해결책은 마음도 몸 따라 늙어가는 것이다. '늙는다'는 어감이 싫으면 '익는다'라는 말도 대치해도 좋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이 결코 자랑이 아니다.

 

오랜만에 어울려 외출할 기회가 여럿 있었는데 몽땅 날아가 버렸다. 낮이 되어서야 겨우 국물을 떠 마시고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잠옷은 아직 갈아입지 않은 상태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사다. 일은 틀어졌지만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 한다. 오늘 밖에 나갔으면 무슨 사고를 만났을지 몰라. 내 수호천사가 미리 막아준 거야. 주어지는건을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늘 같은 날도 감사한 하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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