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의 전설 / 안도현

샌. 2010. 10. 13. 10:33

완주군 경천면 대아리 저수지 물가에

빈 배 한 척 한가로이 매여 있기에

그 배 빌려 타고 단풍놀이나 즐겨볼까 싶어서

주인네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주인은 낮술에 취해 허리띠 풀어놓고

마루 위에 붉은 고추 멍석으로 누워 잠들었고

주인 아낙께서 고추를 매만지다 하시는 말씀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그 말씀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내 아내는

뒷걸음치다가 저만치서 막 불이 붙어서

그만 단풍나무 한 그루로 타올랐습니다

 

- 가을의 전설 / 안도현

 

'가을의 전설'이라고 하면 야구 팬은 한국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삼성과 두산의 포스트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4차전까지 늘 1점차로 승부가 갈려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영화 애호가라면 같은 제목의 영화를 연상할지 모른다. 노란색으로 물든 가을의 전원 풍경이 아름다웠던 영화였다.

 

제목과 달리 시의 내용은 엉뚱하면서 재미있다. '허리띠 풀어놓고' '고추를 매만지다'가 사전단계였다면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는 클라이맥스다. 그리고 단풍이 된 아내가 등장함으로써 긴 여운을 남긴다. 시는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도 내일 강원도로 단풍을 보러 간다. 날씨가 맑으면 밤에는 목성과 안드로메다도 볼 것이다. 무거운 망원경도 가져간다. 그런데 배 탈 일은 없으니 호숫가 짖궂은 아낙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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