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샌. 2021. 12. 20. 11:27

배추 세 포기 절이려고

소금 항아리 열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 한 번 가지 않고 들리는 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낯선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힘이 빠진다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온다

 

큰언니의 번호를 눌러본다

소금 몇 공기 퍼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먹이자

이 바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말끝을 흐린다

 

내 요리책이었던 엄마

음식 만들다 말고 전화기만 들면

몇십 년 한결같이

초판 내용을 유지했었다

 

몇 번을 물어도 반갑게 말해주던

엄마 음성 그리워

배추를 절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물로 푹 절여진 얼굴

간이 밴 표정이 엄마를 닮았다

 

-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감사할 일 투성이네." 얼마 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들은 말이다. 아흔 노모가 시골에서 건강하게 계시다고 하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대신에 불효에 대한 자책과 염려의 크기가 얼마만큼 되는지를 나는 고백하지 못했다. 지인의 슬픔과 안타까움의 무게를 지금의 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은 요리를 통해 엄마를 기억하는 게 많을 것 같다. 특히 김장은 오랫동안 엄마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흔하다. 고향에 내려가서 받아온 엄마표 김장이든가, 또는 함께 김장을 하던 추억이 때가 되면 울컥해질 것이다. 시인은 혼자 김장을 하다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그러면서 시인 또한 버전을 달리 하는 요리책을 쓰고 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 잘 절여질 나만의 레시피가 담긴 요리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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