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샌. 2021. 12. 25. 12:28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몇 년 전부터 크리스마스가 이상하다 여겼는데 제일 큰 이유는 거리에서 캐럴을 들을 수 없어서였다. 지적재산권인가 뭔가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마음대로 틀 수 없다고 한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기분의 절반 이상이 캐럴에서 나오는데 요사이 크리스마스는 앙꼬 없는 찐빵이 되었다. 여기에 코로나가 더해졌으니 오히려 원래의 '고요한 밤'으로 돌아가서 다행인지 모르겠다.

 

늙은 부부만 남아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집은 적막하다. 스마트폰으로 전송되어 오는 손주의 사진을 보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사진 속 손주는 케이크 앞에서 이 세상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성당의 성탄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내는 방에서 혼자 미사를 드린다. 나직한 찬미가가 들린다. 나는 TV 앞에 비스듬히 누워 LPBA 여자 당구 시합 중계를 본다. 김가영 선수는 8강에 올라갔고, 이미래 선수는 탈락했다. 찔끔찔끔 떠오르던 옛날 크리스마스의 추억도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는 화면에 묻힌다.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이브는 어느 해 제천의 도미니꼬 봉쇄수도원에서 드렸던 미사였다. 수녀님들과 몇몇 마을 주민들이 철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올린 성탄 미사는 엄숙하고 거룩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실이 가슴으로 절절이 파고든 경험이었다. 수녀원의 작은 성당에서 나왔을 때 차가운 밤하늘에 빛나던 별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나는 그 시절의 느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택시는 오지 않고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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