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샌. 2022. 9. 8. 11:10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이 올해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이발소'를 개업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웬 이발소? "라고 의아해했는데 '이야기발명연구소'의 줄임말이란다. 그리고 명함의 직함은 '깎사'다. 역시 시인다운 작명이다.

 

이 시를 읽다가 내 뇌리에 박힌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래 전 물리책에서 본 문장이다. "당신이 화단의 꽃을 꺾어 든다면, 저 아득히 먼 곳의 별이 흔들린다." 그때 이 말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려서 몇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은 채 기억하고 있다. 물리학자와 시인의 마음이 닿아 있는 부분이다. 

 

인간이 왜 인간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으며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가슴을 치다가도 어디선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에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다. 지금 나의 즐거움은 안 보이는 먼 곳의 누군가의 눈물과 이어져 있음을 아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잃으면 인간은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환호하는지, 정작 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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