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기 업기 / 이후분

샌. 2022. 9. 19. 10:36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아기 업기 / 이후분

 

 

우리가 어렸을 적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상례였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꼴을 베거나, 뒷산에서 땔감을 하거나, 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하는 일은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송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제일 인기 있었다. 송아지는 제가 알아서 풀을 뜯고, 그동안에 우리는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한참 뒤에야 송아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저녁 느지막이 되어서야 이웃 동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동무는 아버지한테 엄청 얻어맞아서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사소한 집안일이나 어린 동생을 돌봤다. 골목에서 노는 여자아이들 등에는 포대기로 두른 아기가 엎혀 있었는데, 아기를 업고도 못 하는 놀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줄넘기도 했다. 이골이 나서 아기와 한 몸이 된 것이다. 이 동시는 1960년대에 시골의 한 어린이가 쓴 것이다.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가벼워졌다'가 아니라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는 표현이 일품이다. '등때기'는 등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엊그제 고향의 이웃집에 살던 S형한테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2년 선배 되는 형인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락이 끊어졌으니 50년도 더 되어 소식이 온 것이다. 그런데 내용이 희한했다. 옛날에 동네 앞 냇가에서 헤엄치며 놀 때 날 물에 오래 빠뜨려 힘들게 한 장난을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사과'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쓰면서 용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도무지 기억도 못 하는 일이니 황당할 수밖에. 이 형이 인생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 건가, 아직 연유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절에 여름이면 강변은 자갈을 모으는 동네 아낙네와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이 작업에 매달렸다. 강변의 흙을 담아 철사로 얽은 소쿠리를 흔들면 일정한 크기 이상의 자갈만 남았다. 자갈이 쌓여 상당한 크기의 무더기가 되면 트럭이 와서 실어갔다. 농촌의 쏠쏠한 부수입이었다. 자갈을 모으다 지루해지면 물속에 들어가 놀고, 그러다가 불려 나와 다시 자갈과 씨름하면서, 소년 시절 몇 해의 여름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여름 땡볕에 피부는 타서 벗겨지고 물집이 생기고 다시 타서 나중에는 새까맣게 되었다. 그때는 자외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동시와 S형의 소식이 60년 전의 옛날로 나를 소환한다. 몇몇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는 너무 까마득한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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