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늦게 오는 사람 / 이잠

샌. 2023. 2. 17. 16:02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 늦게 오는 사람 / 이잠

 

 

"가서 30촉짜리 다마 하나 사 온나." 그때 우리는 전구를 '다마'라 그랬고, 밝기를 '촉(燭)'으로 표현했다. 정겨운 그 시절 말들이다. 30촉은 지금의 30W에 해당한다. '촉'은 밝기를 의미하고 'W(와트)'는 소비 에너지를 나타내니 동일하지는 않다. 같은 텅스텐 전구라면 소비 에너지에 따라 밝기가 비례할 테니 병행해서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W보다는 촉이 훨씬 더 정감이 간다.

 

"오늘도 목로주점 흙바람벽엔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이 노래 가사에서 '30촉' 대신 '30와트'라 했으면 노래의 맛이 확 달라질 것이다. 단어 하나가 아득하고 그리운 그 시절로 나를 인도한다. 시에 나오는 5촉짜리 전구라면 지금 기준으로는 흐릿한 빛이다. 세상이 너무 밝아져서 이젠 밤도 밤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 왠지 5촉짜리 흐릿한 빛이 그립지 않은가. 5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나이가 진하게 들고 보니 자연스레 5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늦게 오는 사람'은 지금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일 수 있겠고, 또한 그런 마음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