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염소 / 맹문재

샌. 2012. 4. 25. 09:05

벚꽃이 어지럽게 떨어진 길을

어미 염소가 타달거리며 가고 있다

그 뒤에는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총총 따른다

 

우스꽝스러운 몇 가닥의 턱수염 같은 기침을

가끔씩 내뱉으며 간다

 

어디를 보더라도 새끼를 데리고 갈 힘이 어미 염소에게는 없다

그리하여 가던 걸음 멈추고

구치소의 아들을 면회하는 아버지 같은 얼굴빛으로

하늘을 쳐다본 뒤

다시 길을 간다

 

그림자가 그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고 주인을 따르듯

옛날의 어미가 갔던 길을 따라 간다

 

어미 염소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른다

단지 새끼 두 마리가

아니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뒤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새끼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 염소 / 맹문재

 

인간이 가는 길도 염소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이성적 사유가 아니라 동물적 관성과 본능의 힘인 경우가 많다. 집단과 관습에 의한 맹목성이 우리를 지배한다.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염소와 마찬가지다. 고작 새끼들이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일 뿐이다. '우스꽝스러운 몇 가닥의 턱수염 같은 기침' '구치소의 아들을 면회하는 아버지 같은 얼굴빛' 같은 표현을 인간의 모습에 원용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전문가로 자처하는 리더들, 특히 영적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어미 염소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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