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샌. 2023. 6. 6. 09:17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강도야 다르겠지만 누구나 존재의 외로움과 대면하며 살아간다. 나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외롭고 가엽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외로움을 견디고 버티는 힘이 생긴다. 나아가 외로움은 새로운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다.

 

외로움과 고통은 인간이 성숙하기 위한 자영분이다. 인간의 영혼은 외로움과 고통을 먹고 자란다.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산다고 행복일까. 금수저의 삶이 축복일까. 그들의 정신세계는 우리와 다르겠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 인간 성장의 측면에서 -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나 인생에 대한 내적 고뇌로 홍역을 앓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절절한 외로움과 아픔은 기회의 시간이다. 이 시에서 '사소한 것들'에 눈길이 머문다. 어제보다 더 자란 손톱,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 떨어진 단추, 빗방울,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외로운 사람은 알게 된다. 그런 때에는 시인처럼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쓰고 싶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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