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봄날은 갔네 / 박남준

샌. 2023. 5. 4. 09:03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나 하는 것이냐

 

- 봄날은 갔네 / 박남준

 

 

꽃들도 세월 닮아 성질이 급해졌느냐. 매화, 벚꽃, 개나리, 진달래, 잠시 피었다가는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꽃구경 한다고 북적이던 사람들 다 흩어지고 이젠 내년을 기약할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나, 간드러진 노랫소리도 쏙 들어갔다. 어제는 밖에 나갔더니 이팝나무 가로수가 하얀 쌀밥 상을 부지런히 차리고 있었다. 계절은 부리나케 오고 가고, 꽃타령도 심드렁해지고, 그나저나 세월은 왜 이리 빨리 흐르고 지랄이야~ 무슨 태평성대 났다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지랄이야~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평생 / 반칠환  (0) 2023.06.01
짧은 죽음 / 유자효  (3) 2023.05.21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0) 2023.04.25
노인 / 이화은  (0) 2023.04.17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2) 2023.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