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샌. 2023. 4. 6. 09:16

입학식이 따로 없고 자기 생일 아침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덟 살짜리와 열두 살 짜기가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나라,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라며, 아이들의 미래를 돌려달라며, 등교를 거부하는 여학생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할머니와 직장인과 미혼모 여학생이 한집에 사는 나라

등록금을 나라에서 다 대주는 나라

달리기 시합 때 아이들이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골인하는 나라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앞세우는 나라

연간 입국 관광객 수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나라

군대 없는 나라 또한 한둘이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키우지도 않고 수입하지도 않는 나라

에너지를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나라

식량 자급을 위해 농업, 농촌, 농민을 존중하는 나라

새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게 하며 환자를 치유하는 병원이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손자 손녀 세대가 쓰게 하려고 통나무를 잘라 건조하는 나라

시간 은행이 있어 아이 돌보기, 노인 보살피기, 이사, 가사노동, 집수리, 도구나 기계 고치기, 피아노 가르치기 등 재능을 주고받는 나라

댐 건설을 막기 위해 마을 어머니들이 나무에 자신의 몸을 묶는 나라

외부 주주가 아니라 직원이 백 퍼센트 소유하는 백화점이 있는 나라

지역의 수백 농가가 참여해 유기농 낙농 기업을 운영하는 나라

전국민이 헌법을 알아야 한다며 정부에서 헌법 해설서를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하는 나라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은행이 있는 나라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청소년들이 자라나는 나라

동식물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며 집단소송을 제기한 시민들이 사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 즉 '미래를 먼저 사는 나라'가 많습니다.

사실은 나라가 아니고 몇몇 선구자들의 꿈이고 실험이고 도전이겠지요.

아직은 미미하지만 곧 우리 앞에 나타날 좋은 나라의 좋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좋은 이야기가 좋은 삶,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 시가 '끝없이 이어지는 좋은 이야기'의 첫 문장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셨으면 합니다.

 

-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이문재

 

 

초등학교 입학식이 따로 없는 나라는 시인이 뉴질랜드에 갔을 때 현지 교민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자기 생일날 학교에 간다니 아이들마다 입학 날짜가 다 다른 것이다. 전체주의에 물든 우리네 사고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제도다. 그렇게도 돌아가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시인이 말하는 '이 먼 나라'는 한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사례를 모은 듯하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라며 등교를 거부한 여학생은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민 총생산보다 국민 행복지수를 귀중하게 여기는 나라는 부탄일 것이다. 시인이 밝혔듯 다수는 국가의 정책이기보다 선구자들의 꿈이고 도전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것이 좋은 사회,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내용들이다.

 

반면에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부끄럽다. 젊은이들조차 가치 있는 삶이나 이상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야망보다는 공동체의 꿈에 대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어찌 하필 이익만 말하십니까?" 어떻게 해야 나라에 이익이 있겠는가, 라는 양 혜왕의 질문에 맹자가 답한 말이다. 이익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위로는 집권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까지 돈타령에 빠질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국익(國益)이라는 명분으로 사악한 시스템의 모순은 쉽사리 묻혀 버린다.

 

일제 강점기 때 신석정 시인은 '그 먼 나라'를 꿈꾸었다. 한 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이문재 시인은 '이 먼 나라'를 소망한다. 인간 세상에서 '먼 나라'는 말 그대로 너무 멀어 근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꿈마저 버린다면 희망의 싹을 아예 짓밟아 버리는 짓이다. 미래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꾸는 꿈들이 모여 만들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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