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샌. 2023. 4. 25. 07:08

날마다 먹고 먹히는

강한 자가 지배하지도

약한 자가 지배당하지도 않는

초원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잡아먹을 것 없으니

잡아먹힐 두려움이 없다

먹이를 쫓을 일도

부리나케 몸을 숨길 일도 없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허덕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제 페이스는 제가 알아서 꿰매며 간다

 

공연히 몸에 열을 올려

명을 재촉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물려받은 달음박질 기술로

한 번쯤 모래바람을 가를 수도 있지만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

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면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니체는 인간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이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고통의 길을 간다. 니체가 보는 낙타의 삶은 굴종적이고 노예적인 삶이다. 관성에 젖은, 주입된 고정관념에 따른, 시스템에 길들여진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사자는 인간의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사자는 누구에게서도 명령받지 않고 행동한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게 본다. 낙타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을 떠나 자발적으로 사막으로 갔다. 용기 있는 고귀한 정신을 표상한다. 또한 낙타는 지혜롭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낙타는 뛰지 않는다. 급하게 달음박질쳤다가는 쉬이 지쳐서 먼 길을 못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낙타가 달리기를 못하는 게 아니다. 중동 국가에서는 낙타 경주가 열리는데 전력을 다하면 시속 60km로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웬만한 동물들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다. 하지만 사막에서 낙타는 뛰지 않는다.

 

인생을 100미터 경주가 아니라 호흡이 긴 마라톤에 비유한다. 초반에 급하게 달리면 오버 페이스가 되어 뒤처지게 된다. 욕심을 과하게 부리지 말라는 얘기다. 삭막한 모래 위를 여행하듯 천천히 나아가는 낙타의 걸음을 닮을 일이다.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면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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