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시인

샌. 2023. 10. 11. 12:26

<시인>은 이문열 작가가 김삿갓의 일생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가정사를 안다면 김삿갓을 빌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金炳然, 1807~1863))으로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가 난을 일으킬 때 항복하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나이 6세 때였다. 죄인의 집안 자식이라는 올가미를 쓴 채 숨어 살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 전국을 방랑하며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는 즉흥시를 남겼다. 초기에는 신분 상승의 꿈을 가졌으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체제의 일탈자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이문열 작가의 부친은 서울농대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6.25가 터지자 월북했다. 그런 연유로 전쟁 뒤 작가의 고초도 상당했을 것이다. <시인>은 김삿갓 내면의 갈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작가가 충분히 감정 이입을 할 만한 인물이다. <시인>은 소설이기보다 김삿갓 평전에 가깝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료에 작가의 상상력이 입혀졌지만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 통상 알려지기로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할 때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나중에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에서는 다르게 묘사한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는 욕망에서 할아버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 당시의 병연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소설 쪽이 오히려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젊은 김병연은 출세를 위해 권문세가의 문객 노릇을 상당 기간 했다. 이 기간을 작가는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룬다. 그는 기존 체제에 편입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득권층의 냉대였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과 달리 그는 세상을 조롱하는 방랑 시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이문열 작가에게 아버지의 기억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도통 가정사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으려는 것 같다. 아버지와는 달리 작가는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 있다. 20여 년 전에는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작가의 책을 불사르는 장례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작가는 정치 현실에 대한 발언을 이어가면서 보수 우익을 대변한다. 나는 작가의 가치관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작가의 작품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로 볼 것이냐는 해묵은 논쟁이다. 얼마 전에는 강제추행 혐의로 유죄를 받은 임옥상 조각가의 작품이 철거되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까지 거론되던 고은 시인은 이젠 이름조차 못 내밀 지경이 되어 있다. 과연 작가의 비도덕적 행위로 인해 그의 작품까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작가와 작품을 완전히 별개로 볼 수도 없다. 작가의 인품이나 행위가 작품을 대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문열 작가의 유려하면서 고전적인 문체를 좋아한다. 하지만 유명 작가로서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데 조심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작가를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 역시 옛날의 사건 이후로 작가의 책에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시인>을 읽으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으로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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