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지독한 어둠 / 심재휘

샌. 2010. 3. 8. 10:19

아홉 살 딸아이는 어둠이 무섭다고

잠자리에 누워 말한다 나는 스텐드의 불빛을

가을 이불처럼 흐리게 덮어주고 나온다

그러면 딸아이는 오늘 밤

흉한 꿈을 꾸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불 꺼진 거실에 서서

나의 어둠이 밝아지도록 한참을 기다린다

어둠 저편의 방으로 건너가기 위해 나의 눈은

그저기다릴 수밖에 없다

스텐드도 없이

변명도 없이

몸 하나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캄캄함 속에 서보면 안다 그러나 기어이

어둠보다 먼저 밝아오는 슬픔

언젠가는 너도 이 지독한 어둠 속에

결국 혼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나는 온몸에 가난한 어둠을 묻히고

다시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내 이불을 차버리고 잠든 모습이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서글픈 것이냐

 

- 지독한 어둠 / 심재휘

 

인간은 결국 지독한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사실이 시인으로 하여금 어린 딸을 보며슬픔에 젖게 한다. 지금은 흐린 스텐드 불빛이나마 소녀를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짙은 어둠과 홀로 대면해야 한다. 소녀가 자라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어둠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어둠이기도 하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때부터 생긴 어둠이며, 우리가 건설한 모든 것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이다. 어느 때고 좋았던 시대가 있었느냐마는 지금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아이티나 칠레와 같은 공포를 어린 영혼들은 이제 내면에서 경험해야 될지 모른다. 안개 속 저 멀리서 어둠의 문명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린다. 밖에는 봄 햇살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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