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 문차숙

샌. 2010. 2. 22. 17:30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 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 문차숙

 

얼마 전 출근하던 길이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의 굽이 에스컬레이터 끝 부분에 끼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에스컬레이터가 급정거 했고 뒤에 있던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다행히 넘어진 사람은 없었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사실 하이힐만큼 불편한 신발도 없다. 또 발목이나 허리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한다. 내 눈에는 현대퍈 중국의 전족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하이힐을 신은 젊은 여자가 아름답고 섹시하게 보이기는해도 한편으로는 여간 안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나 미(美) 앞에서는 어떤 희생도 각오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여자인가 보다.

 

그런 젊은 시절을 지나 이젠 굽 없는 신발이 좋다는 시인의 마음이 편안하다. 스스로가 굽 없는 신발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하얀 고무신이다. 고무신이 얼마나 편안한지는 나도 여주 생활을 하면서 실감했던 터였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도 그런 고무신 같은 사람이 좋다. 젊었을 때는 하이힐의 뒷면을 볼 줄 몰랐다. 날카로운 굽으로 땅을후비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는지를 헤아릴 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하얀 고무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쳐다보는 사람 없어도 홀로 자족할 줄 아는 그런 넉넉하고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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