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끼니 / 고운기

샌. 2010. 2. 19. 12:37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멍청한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은 아니지

차라리 못 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먹고 들일 나가

날라 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차라리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 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 끼니 / 고운기

 

전 직장의 동료 P는 술자리에서 늘 호기있게 말하며 우리를 웃겼다. 그중에 이런 말도 있었다. 자신이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가면 마누라가 "당신, 사회생활 어떻게 하는 거냐"며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었다. 이 우스갯소리는 사실 뼈 있는 농담이다. 일찍 퇴근하는 남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무의식중에 있기 때문이다. 바쁘게 일하다 자정 가까이 되어 들어와야 능력 있는 남자 대우를 받는다. 저녁을 집에서 먹는 남자라면 출세하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 일이지만 독일에 연수를 갔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저녁 시간 이후의 독일 거리였다. 중심가였는데 가게는 문을 닫고 거리는 썰렁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거야? 물어보니 독일 남자들은 퇴근해서는 대부분이 곧장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늦게까지 가게 문을 열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장사 하면서도 먹고 산다는 게 신기했고, 또한 독일의 가정 중심 문화가 내 눈에는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가 아닌가. 그러면서도 훨씬 여유있고 잘 사는 나라인 것이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한 달 여 일 없이 지내며 집에서 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삼시 세 끼를 집에서 해결하고 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이런 남자를 '삼식이 새끼'라고 하던가. 그래도 다행히 아직은 마누라 눈총은 받지 않는 편이다. 나는 무료하더라도 그저 집에 있는 게 좋고, 김치 하나라도 집에서 먹는 밥이 맛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루에 한 끼도 집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다. 고작 호구지책의 밥벌이를 위해서 애쓰지만 정작 본인들은 집에서 따스한 밥상을 함께 하지를 못한다. 어른만 아니라 아이도 마찬가지인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정말 무슨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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