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샌. 2012. 3. 29. 10:22

이 책이 출판된 게 1999년이니 어느새 13년이 지났다. 제목이 도발적이어서 당시에 많은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었다. 지금 한 걸음 비켜서서 읽어보니 그렇게 호들갑을 떨 내용도 아니다. 이 책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 덕분을 많이 본 것 같다.

당시 한국은 IMF 환란이 지나고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였다. 책에서는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감지된다. 어쩌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되었는지 반성함과 동시에 비난할 대상도 필요했을 것이다. 지은이는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를 근세에 우리가 겪은 3대 위기로 보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지은이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런 위기의 근원에는 우리 문화와 의식을 지배한 유교에 있다고 말한다.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정치'를 위한, '남성'을 위한, '어른'을 위한,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다. 유교 문화는 우리에게 신분사회,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혈연적 폐쇄성, 남성 우월 의식, 가족중심주의, 스승의 권위를 강조하는 등의 폐해를 낳았다. 그러므로 잘못된 유교적 유산을 청산해야 세계화 시대를 선도할 수있다.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갇힌 조선 시대의 지식인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공자 사상과 개인의 영달을 맞바꾼 사이비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내세운 충, 효가 어떤 식으로 왜곡되었는지는 우리도 경험했던 바다. 그러면서 유교나 공자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2,500년의 시대 상황을 떠나 지금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유교가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타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유교가 지향하는 이념이 그릇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현실 기독교의 폐해가 크다고 예수의 가르침이 무시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책이 <논어>를 분석하기보다 현상적인 사례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쉽다.

내가 볼 때 문제는 유교 자체가 아니라 유교의 틀 안에서만 사유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한 폐쇄적 시스템이 문제였다. 정통적 사고방식이 아닌 것은 모두 이단이었고, 주류에 편입하려면 다른 사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결국 상상력의 빈곤을 가져왔고 학문의 다양성을 말살시켰다. 왜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사상가나 철인이 나오지 않았는지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대 사상에 대한 존경과 토론 같은 학문적 바탕이 애초에 없었다. 유교 절대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슬픈 유산이다.

지은이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어 조기교육에 찬성한다든지 신토불이나 제철 음식 먹기에 대해 기피증이나 문화적 폐쇄성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좀 심하다 싶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사고, 보편적 인류정신을 우선 가치로 두는 점 등 배울 바도 많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요구하기보다 우리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을 보호 못 한 정부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더는 과거에 매이지 말고 일본을 용서하는 게 낫다. 지은이는 중국에서 세미나를 할 때 만났던 베트남 교수와의 대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월남전 때 전쟁에 참가했나요?"
"난 계속 선생이었어."
"한국이 전쟁에 참가했는데 미워하지 않아요?"
씨익 웃기만 한다.
"월남 여자들 많이 건드리고, 한국 사람 닮은 애들이 많이 있다던데."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천천히 말을 꺼낸다.
"우린 다 용서했어. 미워하는 건 힘든 일이야."

지은이의 현실 비판은 종횡무진이다. 그중에서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 대목은 이렇다. 지은이의 자아비판이기도 하지만 선생을 했던 나로서도 속이 뜨끔했다.

'교직은 절반은 성직이다. 교실에서 한 말과 찻잔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하는 말이 똑같아야 한다. 정치가 휘저어놓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제자리를 지켜야 할 마지막 파수꾼이 누구여야 하는가? 원칙과 질서를 가르치기로 약속한 장소가 학교다. 신뢰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 보기가 부끄럽다. 아무리 좋은 교육안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떤 물고기도 썩은 물에서는 죽는다. 학교 안은 스스로 선생이기를 포기한 월급쟁이들이 우글대고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 분서갱유나 문화대혁명이 공자를 죽인 대표적인 사례지만 그 이후 더 좋은 나라가 되지 못했다. 공자를 죽이고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갇힌다면 공자는 죽이나마나다. 유교의 병폐는 지은이의 주장처럼 유교에 내재된 것이라기보다는 유교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와 같은 논리로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도 역시 성립하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 인식의 진보는 상식과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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