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선운사에서 / 최영미

샌. 2012. 3. 7. 09:33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 최영미

 

시인은 한 사랑을 떠나보내고 선운사를 찾았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가 4월쯤 되었을까, 뚝뚝 떨어진 선운사 동백꽃을 보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가어느 날 떠나갔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자연의 섭리이듯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서운하고 아쉬운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대가 어찌 꽃이 지듯 쉽게 잊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 왜 그런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소월의 시들과 정서가 닮았다. 멀리서 웃으며 떠나는 그대를 손 흔들며 보낸다. 산 넘어 가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만 잊히지 않으니 인간이고 사랑이다. 만약 한순간에 지는 꽃처럼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면 더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꽃이 떨어짐은 다시 핌에 대한 약속이다. 새봄이 찾아오면 꽃은 다시 온 산야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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